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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Sep 02. 2022

우리는 노을 속에 자유로를 달렸다


"우리 언제 만났었지?"

"작년엔 코로나 때문에 못 만났지."

"얘네 집 공원 앞 카페에서 만난 게 아마 재작년일걸."

열일곱에서 열아홉까지 십 대 후 반 3년을 같이 지낸 친구들을 만났다. 이십 대 이후로 연락이 끊겼다가 십 년에 한 번 정도 잠깐 만났었다. 몇 년 전부터는 그래도 매 년 한 번 씩은 보는 것 같다. 셋 중 주변 사람 누구에게나 먼저 다가가고 먼저 챙겨주는 친구가 있어 가능한 일이다.

오늘도 그 친구가 나서서 날짜를 정하고 시간을 정하고 장소를 정했다. 야근 후에 아침을 건너뛰고 점심을 생략하고 허둥지둥 약속 장소에 갔었다. ​ 나는 졸음이 덕지덕지 앉은 눈꺼풀을 내리깔고 게슴츠레하고 삐딱하게 앉아서 친구들이 구워준 고기를 먹고 밥 한 공기를 먹었다. 눈이 번쩍 떠졌다.

식사를 마치고 찻집을 찾아 시동을 거는데 8월 지나 9월, 가을의 초입이라고 햇살에 자르르 윤이 난다.

"우리, 좀 먼 곳으로 차 마시러 갈까?"

"응, 좋아, 좋아."​

친구들 목소리가 고등학생 시절 저녁 도시락을 먹고 야간 자율 학습을 빠지고 놀 때처럼 신났다.

돌이켜보면 우리가 야간 자율학습 빠지는 짓만 했었나. 미술 시간에 운동장에서 스케치를 하는데 도시락을 들고나가 건물 뒤에서 몰래 까먹다가 미술 선생님께 걸려서 손들고 벌을 서기도 하고, 학교에 일찍 가자고 새벽 여섯 시에 가서 러닝에 파자마 반바지 차림의 음악 선생님이 부스스한 몰골로 건물 현관문을 열어주기도 했다.

선생님 신발을 숨겨 놓고 보물 찾기처럼 군데군데 쪽지를 숨겨 놓고 찾게 만들기도 했고, 정말 교실에 들어가 야간 수업을 하기 싫던 어느 날 운동장 수돗가 뒤에 숨어서 수다를 떨다가 교감 선생님께서 '저기 수돗가 뒤에 숨어있는 여학생 두 명 지금 당장 교무실로 오세요.'라는 방송을 전교에 내보내 망신을 당하기도 했다. 그날 집에 갔더니 같은 학교를 다니던 남동생이 나보고 '아까 그 방송 탄 여학생, 누나였지?'라고 해서 흠칫 놀라기도 했었다.

해가 넘어가는 너른 벌판 바로 앞에 학교가 있었다. 저녁이면 정문 앞에 있던 나무의 그림자를 나무의 몇 배는 되게 늘여놓고 노을은 산 너머로 사라졌다. 어느 날에는 친구 한 명과 나는 노을이 지는 산을 가보고 싶어 무작정 들판 사잇길로 해를 따라 걸어갔었다. 생각보다 멀어 산까지 가지 못하고 돌아왔지만 벌판의 무성한 초록과 초록의 틈을 넘실거리던 붉은빛과 서서히 푸른색으로 변하던 땅거미는 아직 그 자리에 서 있는 듯 눈앞에 생생하다.

친구들 여러 명이 교실에서 오래도록 이야기를 나누기도 했다. 거기 아이들의 이마를 물들이고 눈동자를 갈색으로 빛나게 하고 뺨을 생생하게 하던 노을이 같이 있었다. 교실 유리창을 통해 들어온 노을은 여학생들의 조곤조곤한 수다에 섞여 연한 노란색에서 주황색으로 주황색에서 진주홍으로 변했다. 교실 벽도 덩달아 같이 붉어지고 빈 책상마다 네모난 노을이 한 조각씩 앉아 같이 이야기를 들었다.

 오늘은 창이 아주 큰 3 층 짜리 찻집 야외 탁자에 앉아 붉게 해가 지는 것을 보면서 차를 마셨다.

"네가 그때 원고지 삼천 장을 선물해주었었잖아."

"내가? 기억 안 나."

"어제 일도 기억 안 나는데 기억하려고 애쓰지 마."

이런 말들을 나누며 웃었다. 그때 나누었던 이야기는 생각나지 않지만 '노을'이라는 단어에는 그 시절의 붉음이 물들어있다가 오늘처럼 오랜만에 옛 친구를 만나는 날, 그 붉은색이 흘러나와 오늘의 노을에 덧칠해져서 하늘은 더욱 붉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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