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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Sep 08. 2022

영화, 세 가지 색 : 블루

사회적 자유, 자연인으로서의 자유

영화 ‘블루’는 1994년도에 개봉된 세 가지 색 ‘화이트’와 ‘레드’와 ‘블루’ 중 하나이다. 얼마 전 헤이리 시네마에서 이 영화를 보았다. 영화가 끝나고 오동진 평론가의 ‘관객과의 대화(GV)’가 있었다. 


영화의 줄거리는 간단하다. 한 여자가 교통사고로 어린 딸아이와 남편을 잃는다. 그녀는 아주 큰 상실과 슬픔에 빠져 있다. 그런데 갑자기 남편의 동료이자 자신을 짝사랑하던 남자를 집으로 불러 정사를 ‘한다.’ 그리고 다시 살아간다. 



-하고 싶다

같은 공간에 같이 존재하던 남편과 딸이 죽은 상황에서 줄리의 이런 행동을 이해하기는 쉽지 않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남편의 동업자이면서 자신을 짝사랑하던 남자라니. 그녀가 이 남자를 택한 것은 큰 의미는 없다고 생각한다. 단지 전혀 모르는 남자보다 안전하기 때문이 아니었을까 짐작해본다. 


나는 그녀의 이 행동을 죽음의 현장에서 살아난 사람의 살고 싶은 본능의 분출이라고 생각한다. 자신이 살아있음을 확인하는 행위로 보였다. ‘줄리’라는 이름을 가진 한 남자의 아내요. 어린 딸의 엄마가 아닌, 생명 집단의 한 개체로서 삶을 향한, 다시 살고자 하는 몸짓으로 느껴졌다. 


상실과 공허라는 말은 ‘잃어버림’과 ‘비어있음’이다. 둘 다 없는 상태이다. 그러나 정말 비어있는 상태는 아니다. ‘없음’이 가득 차 있는 상태이다. 살아있는 존재에게 ‘없음’이 가득 차 있는 것은 삶이 아니다. 죽음이다. 살려면 죽음(없음)을 벗어나야 한다. 


죽음의 상태에서 벗어나고자 그녀가 선택한 것이 ‘성(性)’이었다. 인간사회에서 대부분의 성행위는 욕망, 욕구에 의해 이루어지는 경우가 많지만, 관점을 넓혀 인간을 동물의 범주에 넣고 본다면 ‘성행위’는 번식, 즉 생존을 목적으로 한다. 


생존, 살아있다는 것, 살아간다는 것은 무엇일까? 인간이 사회적 존재로 살아가는 것과 자연 존재로 살아가는 것은 다르다. 줄리는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진 삶의 반대인 ‘죽음’과 비슷한 상황에서 해방되기 위해 생명체가 살기 위해 가장 기본적으로 하는 행동 중 한 가지를 했다. 그리고 상실에서 벗어나 다시 살아가게 된다. 



-먹고 싶다

내가 여덟 살 때, 친구 아버지께서 갑자기 돌아가셨는데 장례식장에 다녀온 동네 어른들이 친구 어머니에 관한 이야기를 혀를 끌끌 차며 하는 것을 듣게 되었다. 남편 잃은 여자가 큰 대접에 국을 퍼서 밥을 말아 “먹어야 살지. 내가 이걸 먹고살아야지.” 하며 남김없이 다 먹더라고 흉을 보았다. 


나는 친구 어머니가 갑작스러운 남편의 부재 앞에서 말 그대로 살기 위해 국밥을 퍼먹었다고 생각한다. ‘줄리’도 다시 살기 위해 본능적으로 육체관계를 했다고 생각한다. 그러면 왜 친구 어머니는 ‘먹는 행위’를 하고 줄리는 ‘정사’를 했을까? 답은 간단하다. 어머니는 돌봐야 할 다음 세대가 있고, 줄리는 돌보던 다음 세대를 잃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정사’는 사회적인 인간이 인식하지 못한 본능적인 번식 행위라고 볼 수 있다.



-피고 싶다

몇 년 전 겨울을 앞두고 피어난 채송화를 본 적이 있다. 뿌리가 있는 땅에서 겨우 1센티 정도 줄기를 올리고 엄지손톱보다 작은 꽃이 피었었다. 과연 저 꽃이 씨앗을 맺을 수 있을까 싶었지만 며칠 뒤 동그랗게 씨주머니가 달렸다. 놀라웠다. 


꽃은 자연과학의 측면에서 보면 식물의 생식기이다. 다시 말해 생존을 이어가는 기관이다. 그러니까 극한적인 상황에서도 꽃은 피어야 한다. 아니 극단적인 상황일수록 더욱 꽃은 피고 싶어 한다. 생존의 욕구다. 



-살고 싶다

작년에 어떤 절망적 상황 속에서 무력감으로 끝없이 추락하던 때가 있었다. 불면이 계속되고 식욕도 없었다. 살아있는데 살아있다는 느낌이 들지 않았다. 그때 내게 줄리처럼 할 기회가 생겼다. 


내 안에 잠재되어 있던, 내가 몰랐던 ‘하고 싶다’라는 욕구를 해결하자 ‘먹고 싶다’라는 욕구가 살아났고 ‘먹고 싶다’를 해결하자 ‘피고 싶다’는 욕구가 생겼다. 하고 먹으면서 살아있음의 감각을 다시 깨웠고 꽃처럼 피어나고 싶다는 욕구도 다시 살아났다. 사회적 동물로 살아온 사람의 이상하고 신기한 경험이었다. 



‘블루’, ‘레드’, ‘화이트’ 이 세 가지 색은 프랑스 국기에 들어있는 색이다. 이 중 ‘블루’는 자유를 의미한다. ‘자유’의 사전적 뜻을 찾아보았다. ‘외부의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는 상태’란다. 


억지스러운 해석이겠지만, 이 영화는 사회적 관계에서 만들어진 상실이라는 감정에 구속된 한 사람이 생명체 고유의 자유를 찾게 되는 과정을 보여준 영화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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