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 아침 국 한 그릇

by 최희정

국화에 서리가 피면 겨울

여름 끝무렵이면 과꽃이 피기 시작한다. 그 꽃을 보고 가을이 오겠네 생각한다. 과꽃에 이어 국화가 피기 시작하면 가을이 왔구나 생각한다. 아침나절 국화잎에 찬이슬이 맺힐 때쯤이면 날이 선선해진다. 피고 지고 흐득거리는 봄꽃과 달리 한 번 피면 보름은 자리를 지키는 국화꽃에 서리가 내리면 이제 겨울이다. 창을 열면 이마가 선뜩해지는 계절이 온 것이다.

세수하기 싫은 아침

어릴 때 겨울에 들어서면 마당 수돗가에 놓인 양은 대야는 손가락 끝만 대도 차갑다. 다시 방에 들어가 이불속에 눕고 싶지만 할 수 없이 연탄아궁이에 얹힌 큰솥에서 뜨거운 물 한 바가지를 퍼다 대야에 쏟아붓고 찬물을 섞어가며 안 뜨겁게 안 차갑게 만들어 대충 눈곱만 떼는 고양이 세수를 하고 얼른 방에 들어와 버린다. 추위를 많이 타서 학교 가기 싫은 계절이 왔다. 손도 시리고 발도 시려서 학교 가기 싫지만 가야지 어쩔 수 없다.

싫어도 아침엔 국 한 사발

추운 날 아침이면 국에 밥 말아먹고 학교에 갔었다. 주로 콩나물국으로 슴슴한 맛으로 후루룩 뚝딱 먹을 수 있다. 편식이 심했던 나는 기다란 콩나물이 숟가락 아래로 휘적 늘어져서 싫었다. ‘또 콩나물국이네’ 속으로 투덜거리면서 밥을 겨우 반 공기쯤을 덜어 국에 말아먹는다. 하지만 몇 숟갈 먹다 보면 간간한 국물이 밴 밥알의 감칠맛에 꿀떡꿀떡 먹게 된다. 노란 콩나물 대가리는 씹다 보면 고소하다. 건더기를 다 건져 먹고 남은 국물을 그릇째 들고 쪽쪽 마신다. 입술에 남은 간간함을 혀로 싹 핥아낸다. 그렇게 먹고 나서면 학교 가는 길이 덜 추웠다.

오늘 아침은 된장 뭇국

어릴 적 내가 거들떠보지도 않았던 음식들을 나이 들어 먹게 되었다. 특히 겨울 아침 퇴근길엔 걸쭉한 국이나 탕에 말아 밥을 먹고 싶어 진다. 내가 이렇게 변하다니 상전벽해요, 뽕잎으로 바다 탕을 끓일 일이다. 식전부터 SNS를 보다가 쌀뜨물에 무를 어슷하게 썰어 된장 풀어 끓인 뭇국 사진을 보았다. 침 고인다. 벌떡 일어나 어제 엄마가 준 무를 찾는다. 쌀을 씻어 뜨물을 받고 멸치를 몇 개 넣고 끓인다. 사진을 보니 국에 시래기가 들어있다. 아, 우리 집에 시래기가 있던가?

있다, 시래기

냉동실에 머리를 박고 칸 칸마다 조아리다 보니 먹은 시래기가 한 덩이가 굴러 나온다. 냉장고는 정말 신기한 무생물체이다! 재료를 다 챙겼으니 끓는 국물에 무를 넣는다. 썰어 넣는 게 아니다. 한 손에 토막 무를 쥐고 다른 손으로 칼을 잡고 깎아내듯 쳐내듯 조각조각 잘라 넣는 거다. 반듯반듯 썬 것보다 어슷어슷 삐져 넣는 게 더 맛있다. 여기에 된장을 풀어서 간을 맞추고 시래기도 넣고 청양고추를 쫑쫑 썰어 칼칼한 맛을 살려준다. 무가 투명하게 익으면 완성이다. 바쁜 아침 쉽게 빠르게 만들 수 있다.

국 한 사발에 엄마 생각

뜨신 국에 새 밥 몇 숟갈 넣어 먹다 보니 엄마 생각이 난다. 결혼 전 충무로 병원까지 새벽 출근을 하던 때에도 엄마는 아침을 챙겨 주셨다. 새벽 네 시 반에 일어나 국과 밥을 주셨다. 어릴 때처럼 콩나물국에 달걀을 하나 넣어 반숙으로 익혀주셨다. 재료가 이것저것 섞인 음식을 별로 좋아하질 않아서 달걀흰자가 실처럼 엉겨 붙어있는 이상한 콩나물국이 그때는 싫었다. 지금 나를 먹이기 위해 내가 끓인 채소 된장국을 반찬 없이 먹다 깨닫는다. 새벽 깔깔한 입맛에 반찬도 못 먹고 국에 만 밥만 겨우 몇 수저 뜨고 나가는 딸 생각해서 고기 대신 달걀 하나 넣어 주셨구나. 까다로운 딸 생각해서 달걀을 국에 휘휘 풀지 않고 수란처럼 익혀주셨구나. 그렇게 반숙으로 익히려고 서서 덜 익지도 더 익지도 않게 국 냄비 앞에 지키고 서 계셨겠구나. 덜 익은 노른자 터지지 않게 조심조심 살살 국그릇에 옮겨 담았겠구나. 나는 엄마의 ‘조심조심 살살’을 먹고 새벽 출근을 했었구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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