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도 잘 삭히면 이런 맛이 날랑가.
멀리 부여에서 강원도 속초의 음식이라는 식해가 왔다. 식해는 생선을 삭힌 음식이다. 가자미로 만든 식해가 많이 알려져 있다. 내가 받은 식해는 가자미가 아니라 도루묵으로 만든 것이다. 도루묵은 강원도 동해안 쪽에서 나는 생선이다. 큰 것도 손바닥 하나 반 크기다. 비늘은 없고 미끈거린다. 씹으면 톡톡 터지는 구슬 같은 알로 유명하다.
내게 도루묵은 어릴 때 살던 집 마당을 떠올리게 하는 생선이다. 늦가을 김장철이 되면 정릉 우리 집 마당에는 생선이 있었다. 나무판으로 만든 짝에 들어있은 생선들이다. 명태와 도루묵이다. 할머니는 이것들을 손질했다. 지느러미를 쳐내고 내장을 다듬고 씻어낸 후 뜨거운 기운은 가시고 선선함만 남은 볕에 말렸다. 명태는 빨랫줄에 걸고 도루묵은 채반에 널어 말렸다. 꾸덕꾸덕하게 말린 도루묵과 명태 코다리를 연탄불에 구워 먹었다.
명태는 생물인 체로 김장 김칫독 안에 같이 넣기도 했다. 커다란 항아리 바닥에 두툼하게 자른 무를 깔고 토막 친 명태를 깔고 양념을 켜켜이 넣은 배추를 넣는다. 다시 무를 넣고 또 생선을 넣고 배추김치를 얹는다. 이런 순서로 항아리를 가득 채운다. 마지막에 무를 덮었다. 겨울이 오고 김치에 맛이 들었을 때 꺼내먹는 무의 맛이 좋았다. 엄마의 고향인 강원도식 김치는 젓갈 양념이 진하지 않다. 어린 내가 먹기에도 맵지 않았다. 또 숭덩숭덩 썰어 넣은 무에서 나온 국물이 김치의 맛을 시원하게 해 주었다.
해가 짧아 금방 어둑어둑해지는 겨울날 식구들이 둘러앉아 저녁밥을 먹을 때 땅속 항아리에서 금방 꺼낸 무를 한 입 베어 물면 입 안 가득 시원하고 톡 쏘는 맛이 펴졌다. 커다란 무 조각을 젓가락에 꽂아 왼손에 들고 오른손으로는 숟가락 가득 밥을 퍼서 입에 넣고 무를 한입 크게 깨물어 먹다 보면 밥 한 공기가 순식간에 없어지고 금방 배가 불렀다. 편식이 심하고 입이 짧았지만, 김장 무김치를 먹을 때면 다른 반찬은 거들떠보지도 않았다.
김치가 익으면서 항아리에 같이 넣었던 명태는 흔적이 없어진다. 전라도에서는 각종 생선을 소금에 절이고 숙성시켜 젓갈을 만들어 쓴다면 강원도는 김장김치를 담을 때 조기나 명태 같은 생물 생선을 넣는다. 생선이 들어갔다고 김치가 비리지는 않다. 생선이 김치의 각종 양념과 같이 숙성되면서 오히려 감칠맛이 생기고 국물이 시원해진다. 김치가 익으면서 생선은 딱딱했던 뼈가 물러지고 나중에는 아예 흔적이 없어진다. 생선을 양념에 버무려 숙성시켜 먹는 음식인 식해도 잘 숙성된 것은 생선의 흔적이 거의 없다. 식해는 생선이 많이 나고 겨울이 추운 동해안 지역에서 먹을 수 있는 별미음식이었을 것 같다.
식해에는 조밥을 쪄서 넣는단다. 한단(邯鄲)의 주모가 고단한 노생(盧生)을 위해 지어준 것이 조밥이 아니던가. 이 음식 속의 조밥은 노생의 꿈처럼 흔적이 없다. 조밥뿐 아니라 생선의 흔적도 말린 무의 흔적도 없다. 한낮 잠깐 베개를 베고 누워 잠이 들어 꾼 꿈처럼 없다. 젓가락으로 한 점 집어 맛을 보니 입 안에 비린 생을 잘 삭힌 생선의 감칠맛이 퍼진다. 뻐덕하게 말려 넣었다는 조각 무도 형체가 없다. 살아온 시간의 뿌리마저 사라졌다. 도루묵 알처럼 보이는 것을 집어 먹어보니 곡식의 달큰함이 딱 조밥 한 알만큼 한 점 느껴지다가 사라진다. 바다를 품은 생선의 알인지 땅의 기운을 모은 조의 알인지 모르겠다.
새로 밥을 지어 도루묵 식해를 얹어 밥을 먹는다. 찬찬히 찬찬히 씹으면서 먹는다. 걱정으로 풋내 나는 인생도 잘 삭히면 이런 맛이 날랑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