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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r 18. 2023

늙어도 내 인생은 나의 것


라디오에서 지금 십 대는 백오십 살까지도 살 수 있다는 얘기가 나온다. 지금도 ‘백세 시대’라고 하고 실제로도 65세 이상 노인인구는 전체 인구의 이십 퍼센트에 다다르고 있다. 백 명 중 이십 명이라는 뜻이다.  

    

내가 일흔 살이 되었을 때 나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지금처럼 다달이 월급을 받아서 살고 있을까? 아니면 병이 나서 요양병원에서 고신 고신 하루하루를 연명하고 있을까? 일흔 살인데도 아직 일하는 간호사가 있는 것을 보면 건강하다면 계속 일을 할 것 같다.      


하지만 질병 등의 이유로 생산활동이 끝나는 시기가 온다면 그 이후의 삶은 내일이 어제와 다를 바 없는, 가혹하게 말해서 오늘 죽으나 내일 죽으나 별로 이상할 게 없는 삶이 이어질 것 같다.      


대부분 빨리는 일흔 살 이상부터, 운이 좋아 건강한 신체를 가졌다 할지라도 여든 살 정도부터는 다른 사람의 도움을 받으면 살게 된다. 요양원이나 요양병원에 머무는 인구 중 반 이상이 여든 살이 넘는 사람들이다. 한 건물 안에 몇십 명에서, 많이는 몇백 명의 노인들이 같은 시간에 일어나 아침을 먹고 아침 약을 먹고 점심을 먹고 점심 약을 먹고 저녁을 먹고 저녁 약을 먹고 같은 시간에 잠이 든다.      


내 집이 아니므로 늦은 밤 좋아하는 가수가 나오는 티브이 프로를 시청할 수 없다. 자다가 일어나 화장실을 다녀올 때도 다른 사람이 깨지 않게 조용히 살살 다녀야 한다. 봄이라고 화분 몇 개 들여놓고 꽃을 감상하기도 어렵다.      


시설에서 주는 옷을 똑같이 입어야 하고 시설에서 주는 똑같은 밥을 먹어야 한다. 한평생을 각자의 집에서 개인의 고유한 삶을 살아온 사람들이 늙고 병들었다고 해서 맘대로 나갈 수 없는 한 장소에서 단체 생활을 해야 하는 것은 살아온 삶에 대한 모욕이요, 남은 삶에 가해지는 폭력이라는 생각이 든다.      


현대의학은 인간이 백 살까지 명을 유지하는 데는 큰 역할을 했지만 백 살까지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는 몸을 주지는 않았다. 나는 몇 년씩 요양시설에 갇혀서 여든 살을 넘기고 아흔 살까지 살고 싶지 않다.      


차라리 내 죽음을 선택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어쩌면 노인인구가 늘어나다 보면 불치병이 아니라도 제 죽음을 선택할 수 있는 시대가 올 수도 있을 것 같기는 하다. 질병이 없어도 미리 몇 살쯤에 죽어야겠다는 계획을 세워 죽음을 준비하고 만드는 것을 도와주는 상품도 나올 수 있을지도 모른다.     


죽음과 관련된 상품들도 나오지 않을까? 예를 들자면 멋진 곳을 여행한 후 죽음을 맞이하는 "천국으로 가는 여행 열흘 코스"라든가 죽기 전에 지인들과 마지막 만찬을 즐기는 "천국 길도 식후경" 같은 상품들 말이다.      

지금은 장례식을 대부분 상조회사를 이용한다. 상조회사는 누군가 죽은 후의 절차를 맡아주는 곳이다. 이제는 죽은 후가 아닌, 죽기 전에 죽음을 설계해주는 사업도 생길 것 같다. 늙음과 죽음에 대한 부정적인 시선을 거두고, 내가 사라진 내일보다 살아있는 오늘을 즐길 수 있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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