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이고, 또 콧줄을 뺐어요.”
간병사의 한탄이 흘러넘친다. 나도 당황스럽다. 늦도록 잠을 주무시지 않길래 여러 번 병실을 들락거리면서 혹시 콧줄을 뺄까 봐 살폈었는데 어느 틈에 잡아 빼셨나 보다.
요플레를 먹이니 잘 드시더라는 간병사의 말에 경관식을 숟가락으로 떠서 먹여 드려본다. 잘 삼키신다. 경관식은 음식을 삼키지 못하는 환자들을 위한 식품이다. 보기에는 두유와 비슷한데 각종 영양 성분이 골고루 배합되어있다.
경관식에, 액체를 암죽처럼 걸쭉하게 만드는 보조제를 섞어 떠 먹여본다. 꿀떡꿀떡 잘 삼키신다. 한 수저 드시고 어린 아이처럼 입을 아 벌리고 나를 쳐다본다. 더 달라고.
“맛있어.”
몇 숟갈 드시더니 말문이 트이신다. 무슨 맛이냐고 물어도 맛있다는 말만 반복하신다. 먹고 싶은 음식 있으면 말씀해보시라고 해도 맛있다는 말만 하신다.
“할머니, 딸기 드실래요? 아니면 사과? 포도?”
새콤하고 달콤한 여러 가지 과일 이름을 말해본다. 듣기만 해도 입안에 침이 고일 텐데 반응이 없으시다. 이미 오래 전에 머릿속에서 과일을 잊으셨나 보다.
딸기. 빨간색으로 달큰한 향이 매혹적인, 손가락 끝으로 과육을 누르면 투명하고 붉은 물이 뚝 떨어지는, 이유식을 시작하는 아가들도 처음 그 맛을 본 후로는 계속 찾게 되는 과일. 혀가 맛본 순간, 그 색을 눈이 기억하고 그 향을 코가 기억하고 그 촉감을 손이 기억해서 뇌에 저장한 후, 붉고 촉촉하고 달큰한 그것을 보면 자동으로 입에 침이 고이고 먹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하는 과일이다. 보지 않더라고 ‘딸기’라는 단어만 들어도 우리는 딸기를 딸기답게 떠올리지 않는가.
이제 할머니는 딸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어쩌면 눈앞에서 보면, 다시 향을 맡으면 기억할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딸기’라는 말로는 기억해내지 못한다. 그저 눈앞의 걸쭉한 암죽만 더 달라고 하신다. 딸기 한 알 할머니에게 보여드리고 싶다.
“아줌마도 먹어봐요. 맛있어요.”
할머니는 먹여주는 내게도 권하신다. 같이 먹자고 권하시는 것을 보니 심성이 고운 분이시다.
어느 날 크게 아프시고 입으로 음식을 드시지 못하게 되었을 때, 병원 측의 권유에 자식들이 동의하여 콧줄을 넣은 후 할머니는 음식을 먹을 기회를 잃어버렸다. 그때는 매우 아팠으니 어쩔 수 없었다. 그 후 건강은 그럭저럭 회복되었지만, 여전히 콧줄을 낀 채 경관식에 의지하고 계신다.
다리를 다치고 회복할 때, 마치 아기가 첫걸음을 내디딜 때처럼 차근차근, 한 발 한 발 디디며 걸음 연습을 한다. 마찬가지로 음식을 삼키는 일도 훈련이 필요하다. 아기에게 처음 젖 이외의 음식을 주는 과정과 같다. 첫 이유식을 먹이는 것처럼 잘 익혀서 곱게 갈아서 조심조심한 숟갈씩 떠먹여야 한다. 잘 삼키는지 살피면서.
그런데 요양병원은 이렇게 해주기가 어렵다. 특히 요즘처럼 간병사를 구하기 어려운 시절에는 특히 더 그렇다. 이삼십 분을 잡아먹는 이 일을 하려고 하지 않는다. 여러 명의 환자를 돌봐야 하니 시간이 부족하다.
간호사나 조무사도 할 시간이 없는 건 마찬가지다. 병원은 법이 정한 최소 인력만 배치한다. 지금 주어진 일만으로도 헉헉거리게 된다.
따로 음식을 삼키는 훈련을 시키려면 큰 병원에 가서 그 훈련을 할 수 있는 기능이 있다는 검사를 받아와야 한다. 아직 코로나가 끝나지 않은 지금, 누워지내는 환자를 모시고 가서 그 검사를 받아오라고 보호자에게 말하기 어렵다. 말해도 가지 않는 보호자들도 있는데 그들을 탓할 수는 없다. 그들도 부모님의 병원비를 벌기 위해 매일 애쓰는 것만으로도 벅찰 거다.
결국 할머니는 다시 콧줄을 꼈다. 혀는 아직 맛을 기억하고 있고 할머니는 그 맛을 표현할 수도 있지만 아마도 살아 계신 동안 다시 달고 쓰고 시고 매운 맛을 경험할 기회는 거의 없을 것이다.
늦은 밤 아들이 라면을 끓인다. 집 안에 구수하고 매콤한 라면 냄새가 가득 들어찬다. 입 안에 저절로 침이 고인다. 젓가락을 가져와 한 젓갈 건져 후룩 먹는다. 매끈하고 부드러운 면이 목구멍으로 쑥 내려간다. 라면을 먹고 나서 커피와 아이스크림을 먹는다. 뜨거움과 차가움이 동시에 입 안에 퍼진다. 커피의 쓴맛과 아이스크림의 달콤함이 혀에 같이 감긴다.
아이스크림의 차고 달콤한 느낌 끝에, 밍밍한 암죽을 맛있다고 먹어보라고 권하던 할머니의 말이 귀에 걸린다. 목에 걸린다.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