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상 옆 창문으로 보이는 나무의 잔가지가 흔들린다. 고개를 돌려 나무를 본다. 가지에 새로 돋은 연두의 잎이 보인다. 이파리 끝에 물방울이 맺혀 있다. 빗방울이다. 비가 오는구나.
타닥타닥. 빗방울이 천천히 여린 잎을 두드리는 소리가 난다. 툭툭 툭. 느긋하게 가지를 스치는 소리도 난다. 잎을 두드리고 가지를 스치던 빗방울들이 모여 더 큰 물방울이 되고 주르륵 흘러내린다. 땅으로 스며든다. 말로 글자로 표현할 수 없는 여러 가지의 소리가 비의 존재를 알려온다.
의자에서 일어나 창문을 연다. 쏴아 츠츠츠츳 툭툭 딱 탁. 소리가 더 커진다. 더 다양해진다. 빗소리에 잠긴 귀가 행복하다. 눈을 감는다. 심호흡을 한다. 깊게 숨을 들이마신다. 허전하다.
없다. 비 오는 날 창문을 열면 빗소리와 함께 달려와 숨결에 숨어들던 비 냄새가 없다. 축축하면서도 서늘한 비 오는 날 특유의 냄새가 사라졌다. 빗방울이 잎에 부딪히면서 잎이 흔들릴 때 잎맥에서 튕겨 나오는 비릿한 초록의 향기도 없다. 물이 땅을 적시면서 흙이 부풀어 오를 때 풍기는 텁텁하면서도 따뜻한 냄새도 없다. 비 오는 날 맡을 수 있었던 모든 냄새가 사라졌다.
나는 지금까지 비가 오면 눈으로 비가 내리는 풍경을 보고 귀로 빗물이 흐르는 것을 듣고 코로 비가 발산하는 냄새를 들이켜면서 비의 존재를 인식했었다. 그런데 오늘은 빗소리만큼이나 다양하게 내 콧속으로 밀려 들어오던 ‘비냄새’가 없다. 사라졌다.
아니 비냄새는 있는데 지금 내가 그것을 인식하지 못한다. 이상하다. 있는데 없다. 비 오는 풍경을 망연히 쳐다본다. 분명 저 속에 수많은 냄새의 입자들이 있을 것이다. 내가 숨을 쉬는 동안 코를 통해 내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며칠 전에 후각을 잃기 전에 그랬던 것처럼 지금도. 단지 내가 인식하지 못할 뿐이다.
얼마 전에 식물도 소리를 낸다는 기사를 보았다. 토마토는 물이 부족하면 ‘뽁뽁’ 소리를 내는데 물이 아주 부족할수록 소리가 커진다고 했다. 단지 토마토의 소리는 우리 귀가 들을 수 없는 영역의 소리라서 우리가 듣지 못할 뿐이고 우리는 지금까지 토마토는 말을 할 수 없는 식물이라서 조용하다고 생각했다는 것이다. 작은 식물조차도 소리로 존재를 드러내고 있었다.
코로나로 냄새가 갑자기 사라졌다. 손바닥에 향수를 뿌려 킁킁거려도 아무 냄새도 안 난다. 메릴린 먼로가 살던 시절에 코로나가 유행이 아니라서 다행이라는 우스운 생각이 든다. 만약 그녀가 잠들기 전에는 맡을 수 있었던 샤넬 향수의 향기를, 자고 나니 맡을 수 없었다면 얼마나 당황스러웠을까 싶다. 그저 알몸이라니!
세상에는 내가 느끼지 못하기 때문에 없다고 생각한 것들이 얼마나 많을까? 우주 안의 작은 별에 아주 짧게 머물다 가는 인간인 내가 알고 느끼는 것은 얼마나 작은 부분일까? 그렇게 작은 부분인데도 나는 내가 살아온 시간 속에 스며있는 ‘향’과 ‘취’의 기억으로 무향무취가 당황스럽다. 전혀 낯선 새로운 세계로 진입한 기분이다.
이렇게 우스개 소리를 끄적이고 있지만 냄새가 그립다. 일주일 정도 시간이 지나면 후각이 다시 돌아온다고 한다. 향기는 마치 알라딘의 요술 램프 같아서 잠깐 코끝을 스쳐 지나가도 그 향기와 함께 했던 추억의 시간을 선명하게 다시 피워 올려준다.
작년에 딸이 사준 핸드크림의 향기를 맡을 때면 딸과 함께 밥을 먹고 걷고 백화점에서 쇼핑을 하던 그날이 고스란히 떠오른다. 어서 빨리 그 장미꽃향이 섞인 핸드크림 향을 다시 맡고 싶다. 그리고 봄날의 비 냄새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