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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y 18. 2023

호록 후루룩 메밀국수

끓는 물에 면을 넣고 삶는다. 불을 끄고 이삼 분 둔다. 면을 삶아 바로 건지지 말고 뜸을 들이란다. 면도 뜸을 들이는구나. 사람이 하는 일에 뜸을 들이면 답답하고 흉이 되지만 밥이나 면은 뜸이 들면 보드라워지고 깊은 맛이 스며드는구나.     



엄마는 식탁에 앉아 내가 가져온 것들을 구경하고 계신다.     


"얘, 너 일본말 모르지? 이거 ‘소바’라고 쓰여있는 거야."

"나도 ‘소바’라고 쓰인 거 알아."

"그럼 이건 뭐야?"

"와.사.비."

"어머 넌 일본말도 아는구나."     


나는 속으로 큭큭 웃는다. 엄마 손가락 옆에 ‘메밀소바’라고 한글로 쓰여 있는 걸 재빨리 봤거든. ‘와사비’는 일본어 세 글자가 있으니 당연히 ‘와사비’라고 쓰여 있는 거겠지. 찍은 거지. ‘와사비’ 포장에 ‘와사비’라고 쓰여 있을 게 뻔하잖아. 큭큭.     



연갈색으로 익은 메밀국수를 건져 찬물에 헹군다. 채반에 올려 물기를 뺀다. 우묵하고 색이 이쁜 대접에 면을 담고 간을 맞춘 쯔유를 붓고 무를 갈아 얹는다. 김은 소금기를 털어내고 기름기는 종이에 걷어내고 가늘게 채를 치려고 했는데 엄마가 이미 비닐봉지에 넣고 잘게 부숴버렸다. 어쩔 수 없지 뭐.      



엄마의 표현으로는 ‘모밀 소바’. 엄마가 좋아하는 음식이다. 엄마에게 받은 입맛이라 나도 좋아한다. ‘호록 호로록 후루룩’ 엄마랑 내가 둘이 앉아 메밀국수를 먹는 소리가 모녀간의 수다와 섞여 퍼진다. 엄마는 다음엔 애들도 데려오란다. 내게 받은 입맛이라서 아들도 이 음식을 좋아한다. 그래, 여름이 오면 아이들도 데리고 와서 같이 먹어야겠다.      


장국에 찍어 먹는 메밀국수는 자극이지 않아 삼 대가 같이 앉아 먹을 수 있다. 아흔을 바라보는 엄마를 앞에 놓고 이십 대 중반인 아들과 서른의 문을 두드린 딸을 옆에 놓고 함께 먹기 좋다.   

   


국수를 먹으면서 세대 구분 없이 입술을 동그랗게 모아 면을 빨아들이는 재미를 맛볼 수 있다. 오누이 사이에 마주 앉아 짭짤하고 달콤한 장국이 묻은 입술을 혀로 훔치며 기분이 좋아질 수 있다. 둥글고 우묵한 대접에서 면 한 젓가락을 끌어 올려 입으로 가져갈 때마다, 할머니와 손자가 서로 다정하게 고개를 숙이며 예의를 차리게 된다. 어떤 사람도 고개를 빳빳하게 쳐들고 국수를 먹을 수는 없으니까.     



‘쏴아 차르르’ 창밖에서 빗소리가 난다. 빗줄기가 초록 수국잎을 두드린다. 보라 붓꽃의 색을 진하게 한다. 병 꽃은 더욱 붉어졌다. 작약은 마지막 뜨거움을 버린다. 여름처럼 더운 봄날 점심으로 국수를 먹은 모녀가 베란다로 나가 마당 꽃을 구경한다. 비를 맞는 꽃들의 색색 가지 사연을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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