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최희정 Jul 14. 2023

어제는 폭우, 그러나 초록


어제 한 사람을 만났어요. 나보다 눈이 동그랗게 예쁘고 웃을 때 내가 없는 눈웃음도 있고 나보다 날씬하고 나보다 젊은 사람이에요. 옆트임 치마를 앞트임 치마로 착각해서 돌려입는 패션 감각도 있어요. 자기 이름을 ‘홍길동’으로 남겨두는 등 나보다 더 웃기기도 해요.   

  

질투 나요. 내 질투를 느꼈는지 멕여요. 껍질까지 완전히 제거한 순 메밀로 만든 따뜻한 메밀국수를 멕여요. 아주 연한 갈색의 국수가 부드러워요. 국물은 짭조름해요. 달걀을 풀어 독특해요. 밖에는 연신 비가 내려요. 마주 앉아 국수 먹기 좋은 날이에요.     


국수를 멕이더니 찻집으로 데려가요. 호숫가를 따라 카페들이 줄줄이 있어요. 그 중에서 진한 초록 차양 아래 노란 불빛이 환한 곳으로 데려가요. 바질 에이드라는 초록색 음료와 라떼를 시켜요. 에그타르트와 초코칩 쿠키도 시켜요. 역시 잘 멕여야 유순한 관계가 유지된다는 ‘동막골 정신’을 아는 사람이에요.   

  

‘바질 에이드’라는 음료는 처음 먹어봐요. 잣과 마늘과 딱딱한 치즈와 올리브기름을 넣고 갈아서 기름장을 만들어 파스타에 섞어 먹거나 생잎을 피자에 얹어 먹거나 하는 그거요. 바질과 비밀의 재료를 섞어 얼려 얼음 보숭이를 만들어서 시원한 탄산수 위에 한 덩이 얹어주네요. 모양도 색깔도 예뻐요. 뽀글뽀글 올라오는 탄산수 기포와 살살 녹으면서 아래로 내려가는 바질의 초록이 참 잘 어울려요. 밖에는 연신 비가 내려요. 하지만 마음에는 초록 물들어요.      


그 유명한 라떼도 마셔요. 눈을 살짝 감고 한 모금 마셔요. 입 안에 쌉싸름한 커피의 맛이 먼저 들어와요. 씁쓸할 틈이 없이 우유의 부드러움이 혀를 감싸요. 마음도 감싸요. 음 맛있어라. 까무룩 정신줄 놓기 좋은 맛이에요. 눈을 살짝 뜨니 커피잔 속에 하트와 하트와 하트가 있어요. 겹겹 겹겹 있어요. 두근두근 뛰는 심장 같아요. 뿅 사랑에 빠진 두 개의 심장 같아요. 사랑과 사랑이 뜨겁게 만나는 ‘야, 좋구나!’의 경지를 맛봐요. 그래서 이 라떼의 별칭이 ‘야한 라떼’입니다. 까르륵 깔깔. 밖에는 연신 비가 내려요. 야한 라떼를 본 초록이 아아, 오오오 흔들려요.     


그녀는 나에게 맛난 걸 많이 멕이면서 웃겨요. 웃는 눈이 예뻐요. 그 눈웃음 사고 싶어요. 웃음도 전염이 되죠. 나도 웃어요. 우리는 웃으면서 웃기지 않은 이야기를 해요. 웃을 수 없는 이야기도 해요. 밖에는 연신 비가 내려요. 초록이 창 밖에 서서 우리 얘기를 엿들어요. 덕분에 우리는 초록으로 웃을 수 있었어요.     


오늘도 호우경보가 내렸어요. 어제보다 비가 더 많이 올 예정인가 봐요. 하지만 아직 어제의 초록에 물들어 있는 그녀와 나는 오늘도 초록일 겁니다.

매거진의 이전글 모감주 그늘은 환하게 노랗고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