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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Jul 04. 2023

모감주 그늘은 환하게 노랗고

    

그날, 처음 만났던 날, 비가 왔던가요? 비가 오다 그치고 땅이 젖어 있었던가요? 그날, 처음 만나 걷던 날, 나무는 비의 흔적으로 초록이 더욱 진하게 우러나고 있었던가요? 초록이 뿜어내는 싱싱한 단내, 젖은 흙냄새가 숲길을 채우고 있었던가요?     


그건 잘 기억나지 않습니다. 노란 꽃을 무성하게 매달고 있던 나무는 기억납니다. 잔별 같은 꽃이 젖어 검어진 땅에 수북수북 떨어져 땅을 노랗게 물들이던 것은 기억납니다. 나무는 키가 커서 그 아래에서 가지에 피어있는 꽃을 올려다볼 수 있었고 가지 아래 떨어진 꽃을 내려다볼 수 있었던 것도 기억납니다.   

   

앞서 걷던 두 사람은 이야기에 정신이 팔려 꽃이 핀 것을 모르고 지나갔지요. 꽃 떨어진 땅을 모르고 지나갔지요. 그들 뒤를 따라가던 내가 걸음을 멈추고 꽃으로 가려진 노란 하늘을 올려다보았고요, 나보다 두 걸음쯤 뒤에 걷던 당신도 걸음을 멈추고 꽃으로 물든 노란 땅을 내려다보았지요.     


“아, 궁금해라.”     


당신의 한마디 말에 나는 걸음을 멈추었습니다. 앞서서 가던 사람들도 걸음을 멈춰 섰고요. 당신이 손을 들어 나무를 가리키자 나와 그들 세 사람은 돌아서서 나무 아래로 모였지요. 그리고 당신처럼 꽃을 보고 이마를 노랗게 물들이고 땅을 보고 눈빛을 노랗게 적셨지요.     


당신이 궁금해하던 그 나무 이름은 모감주랍니다. 따뜻한 기후를 좋아한다는데 겨울이 추운 파주까지 올라와 꽃을 피웠습니다. 요즘 자유로에도 있습니다. 오늘 서울을 가면서 보니 왼편으로는 모감주나무 꽃이 진노랑으로 길을 적시고 오른쪽은 능소화가 진주홍으로 갓길에 방점을 찍고 있더군요.     

 

영어 이름은 골든 레인(golden rain)이랍니다. 이 꽃이 진 자리를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황금비’라는 이름을 갖게 되었는지 금방 알 수 있지요.     


염주나무라고도 불린답니다. 까맣고 동그란 열매로 염주를 만든다지요. 실에 꿰어 손에 쥐고 한 알 한 알 밀어내다 보면 상념도 잡념도 번민도 번뇌도 알알이 밀려 멀어질까요.    

  

오늘처럼 달이 휘영청 밝은 밤이면 그날 그 자리 모감주 꽃은 어떻게 지낼지 궁금하네요. 달빛에 농익어 더욱 노랗게 흥건할지, 땅에 떨어졌던 꽃들이 밤을 틈타 달빛에 섞여 구름을 노랗게 출렁이게 할지, 그것도 궁금하네요.      


어쩌면 올 장마는 노랑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모감주 꽃이 만든 금빛 찬란한 노란 그늘, 그 아래 서 있던 흰 모자를 쓴 단아한 당신의 모습으로 기억될 것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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