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장기려 평전을 읽고 있다. 최근에 있었던 초등학교 교사의 죽음에 관한 기사를 접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사람이 ‘장기려’였다. 이유는 모르겠다. 기사를 보는 순간 바로 ‘장기려’라는 이름이 떠올랐으니까. 이름을 검색해 보다가 최근에 그의 평전이 나왔다는 것을 알았다. 그리고 그 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장기려는 의전 입학 당시 ‘가난하고 헐벗은 불쌍한 환자들의 의사가 되겠다’라고 한 하나님과의 약속을 지키려고 평생 노력한다.
그는 평안북도가 고향인데 6·25 전쟁 중인 1950년에 남하했다. 이듬해에 부산 영도의 한 창고에서 빈민에게 무료진료를 하기 위한 복음진료소를 만든다. 이것이 장기려 의료활동의 거점이 된 복음병원의 시작이다. 전쟁으로 집을 잃고 가족을 잃고 돈이 없는 사람들을 돈을 받지 않고 진료해 주었다.
1968년에는 청십자 의료보험 조합을 만들어 가난한 사람들에게 의료복지 혜택을 주기 위한 기틀을 마련하였는데 이는 한국 최초의 의료보험 조합이라고 할 수 있다. 1975년에는 보험 조합 직영의 청십자병원을 개설하였다. 또한 간질 환자 치료모임인 ‘장미회’를 설립하여 그 치료에도 정성을 쏟았다. 그는 이러한 지역사회 봉사 활동에 대한 공로를 인정받아 1979년 막 사이사이 사회봉사상을 받았다.
책은 장기려라는 사람이 살아온 이력을 정치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고 객관적으로 기술해 놓았다. 훌륭한 일을 많이 했지만, 그 업적을 빛나게 치하하지도 않는다. 오히려 자신의 흉상을 세우는 것을 반대했던 장기려처럼 그의 일생을 보태거나 빼거나 수식해서 돋보이게 하지 않았다.
장기려는 복음병원에서 정년 퇴임할 때도 자기 이름으로 된 집 한 채가 없었다. 복음병원이 병원 옥상에 마련해 준 20여 평 관사가 전부일 정도로 평생을 무소유로 일관하였다. 그는 뛰어난 의사였지만 의술을 특별한 사람들을 위해서 쓰지 않았다. 대통령이든 거지든 행려병자든 모두 같은 사람으로 대했다. 사람을 오로지 사람으로 대한 의사였다.
돈이 많고 적음으로 사람을 나누고 지위가 높고 낮음으로 사람을 가르는 세상이다. 나의 이익을 위해 타인을 아프게 하는 일이 많아지고 있다. 심지어 목숨조차 하찮게 여기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군인을(사람을) 구명조끼도 없이 범람하는 물속에 들여보내 실종자를 수색하게 한 일, 교사에게(사람에게) 폭언과 폭행을 가하는 일이 그렇다. 2인 1조로 일해야 하는 노동 현장에서 혼자 일하게 하는 것도, 길을 걷는 사람에게 칼부림을 가하는 일이 그렇다.
말로 얼음 칼을 만들어 휘두르는 일도 많다. 배가 침몰하여 수백 명의 학생(사람)이 죽었는데 책임을 정확히 따지지 않는 것, 좁은 골목에 수많은 사람이 갑자기 몰려서 선 채로 죽었는데도 어쩔 수 없었다는 핑계를 대는 것, 지하차도에 물이 범람하여 애먼 목숨이 어이없이 사라졌는데도 딱히 할 수 있는 일이 없는 상황이었다는 변명도 칼과 다름없다. 사람을 찌르고 아프게 한다. 사람들은 언제 어디서 칼이 날아올지 몰라 전전긍긍한다. 점점 커지는 두려움으로 무기력증에 빠져들고 있다.
얼마 전에 우연히 보았던 짧은 동영상이 자꾸 뇌리에 맴돈다. 할머니 한 분이 아픈 강아지를 데리고 동물병원을 찾았다. 의사는 이 강아지가 얼마 살지 못할 것이라고 말한다. 무릎에 강아지를 앉히고 이야기를 듣던 할머니는 두 손을 들어 강아지의 귀를 막아준다.
강아지는 의사가 하는 말이 무슨 뜻인지 모르는 표정이었다. 만약 알았다면 할머니에게 편안한 표정으로 안겨있지 않았을 것이다. 그런데도 할머니는 주름진 두 손으로 강아지의 귀를 막아주었다.
그분의 행동에서 아픈 짐승을 연민하고 안타까워하는 마음이 보였다. 그 손짓에서 강아지가 혹시라도 말을 알아듣고 두려워할까 봐 안쓰러워하는 마음도 느껴졌다. 표정은 무척 담담했지만 죽음을 앞둔 반려동물에 대해 할머니가 갖는 애틋함이 고스란히 내게 전해졌다. 할머니는 강아지에 스며들어 있는 것 같았다.
다치지 않아도 될 사람이 다치고 죽지 않아도 될 사람이 죽고 있는 데도 나쁜 말들이 넘친다. 끔찍한 말들이 범람한다. 장마 끝에 강 하류로 쓸려 내려온 쓰레기 같은 말들이 넘실거린다. 폭우처럼 쏟아져 내린다. 말들이 얼음으로 만든 칼처럼 사람을 찌르고 사라져 버린다. 고스란히 우리 귀를 뚫고 글이 되어 눈을 찌른다. 듣지 않고 보지 않게 막아주고 가려주는 손이 있었으면 좋겠다. 강아지의 귀를 막아주던 할머니의 손처럼.
만해 한용운의 ‘군말’이라는 시는 ‘님만 님이 아니라 기룬 것은 다 님이다’로 시작한다. ‘기룬’은 만해 특유의 시어로 초판에는 ‘긔룬’으로 되어있다. 그립다, 기릴만하다, 안쓰럽다, 기특하다 등으로 해석된다. 이 시는 ‘나는 해 저문 벌판에서 돌아가는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羊)이 기루어서 이 시(詩)를 쓴다’고 끝을 맺는다.
벌판에서 사람들이 길이 없어 방황하고 있다. 나라는 사람 하나는 보잘것없지만, 기루는 마음으로 사람들의 손을 잡아주고 싶다. 귀를 가려 늑대의 울음을 막아주고 싶다. 사람을 사람으로 대하는 마음을 나누고 싶다. 당신들이 내게 그런 마음으로 손 내미는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