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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Feb 22. 2022

서른, 잔치는 끝났을까?


물론 나는 알고 있다/내가 운동보다도 운동가를/술보다도 술 마시는 분위기를 더 좋아했다는 걸/그리고 외로울 땐 동지여!로 시작하는 투쟁가가 아니라/낮은 목소리로 사랑 노래를 즐겼다는 걸/그러나 대체 무슨 상관이란 말인가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中 일부]     


서른 살 나는 무엇을 하고 있었던가. 

돌 지난 아이를 업고 오가는 골목에서 서른을 맞았다. 골목 모퉁이를 돌면 나오는 마당 너른 집 담장 너머로 뚝뚝 떨어진 모과나무 잎을 보면서 한때 인연을 같이 했으나 소식을 놓친 사람들의 안부를 궁금해하며 서른을 맞았다.  

    

늦은 저녁 가로등 노란 불빛이 만들어낸 긴 그림자를 보며 서른을 맞았다. 공부도 운동도 작파하고 무릎 꿇고 매달렸던 연애와 깔끔한 옷차림으로 비싼 밥을 즐겼던 연애와 내가 먼저 돌아섰던 연애는 가뭇없고 업힌 채로 잠이 든 아이의 온기로 등이 따뜻해지는 것을 느끼며 서른을 맞았다.    


  

잔치는 끝났다/술 떨어지고, 사람들은 하나둘 지갑을 챙기고/마침내 그도 갔지만/마지막 셈을 마치고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지만/어렴풋이 나는 알고 있다/여기 홀로 누군가 마지막까지 남아/주인 대신 상을 치우고/뜨거운 눈물 흘리리란 걸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中 일부]     


잔치는 끝난 걸까.

신촌시장 골목에서 일주일에 한두 번 만나 급하게 문건만 주고받고 헤어지던 이름도 모르던 그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여전히 흰 봉투에 담긴 혁명을 점퍼 안주머니에 급하게 쑤셔 넣으며 살까, 아니면 지폐가 두둑한 월급봉투를 호기롭고 느긋하게 집어넣으며 살까.     


학생회관 건물 3층 여자 화장실에서 최루탄으로 붉어진 눈을 씻고 얼굴에 분을 바르고 입술을 붉게 칠하는, 패션이라고는 전혀 모르는 내가 봐도 위장이라는 것이 표가 나는 화장을 하던 선배는 어떻게 살고 있을까. 매캐한 화약 냄새를 숨기고 구로동의 어느 공장으로 갔을까. 나처럼 아이의 토한 젖내를 풍기며 살까.     



그가 부르다 만 노래를 마저 고쳐 부르리란 걸/어쩌면 나는 알고 있다/누군가 그 대신 상을 차리고, 새벽이 오기 전에/다시 사람들을 불러 모으리라/환하게 불 밝히고 무대를 다시 꾸미리라 [최영미 서른, 잔치는 끝났다中 일부]     


서른은 지났다.

서른이 지나고 마흔도 지나고 쉰도 지났다. 사람들이 다시 모여 환하게 불 밝혀 다시 꾸몄던 무대는 광대들 차지가 되었다. 술 떨어진 잔칫상과 볼 것 없는 삼류 무대에 사람들은 다시 지갑을 챙겨 제각기 신발을 찾아 신고 떠났다.     


나의 서른이 지나고 등에 업혔던 아이는 자랐다. 내년이면 아이가 서른이다. 스무 살로는 다시 돌아가고 싶지 않다는 아이에게 잔칫상을 한번 차려주고 싶다. 무대를 만들고 주고 싶다. 너의 잔칫상에 필요한 품목을 구해줄 테니 상은 네 맘껏 차리고 다른 서른 살들을 불러와 먹고 마시고 무대를 즐기라 하고 싶다. 굿판이 아닌 무대와 잔치를 즐기라 하고 싶다.    

  

새봄 밤꽃 놀이 잔치에 어울리는 노래를 골라봐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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