몇 달 전에 부서장으로 승진한 지인이 있다. 그는 성실한 사람이다. 남을 시키기보다는 자기가 먼저 움직인다. 순한 사람이다. 궂은일이 있어도 불평하지 않는다. 그리고 대단한 사람이다. 결혼하고 아이들을 키우다가 간호사가 되고 싶어 남편을 설득해서 마흔 무렵에 간호대를 다니며 공부했다. 나도 서른에서 마흔 사이에 다른 공부를 해볼까 생각했지만, 비용도 부담스럽고 아이들은 누가 키우나 싶은 생각이 들어 실천하지 못했다. 그런데 그는 해냈으니 자기 인생을 멋지게 사는 대단한 사람임이 틀림없다.
“매일 매일 도망가고 싶어요.”
그런 사람이 며칠 전에 한숨을 쉬며 내뱉은 말이 자꾸 마음에 걸린다. 평간호사로 있을 때와 달리 한 병동을 책임져야 하는 위치에 있다 보니 일이 많아졌다. 날씨가 추워지다 보니 갑자기 상태가 나빠지는 노인 환자들이 있다. 하룻밤 사이에 고열이 끓고 기침을 하거나 특별한 이유 없이 토하거나 소변이 안 나오고 의식이 가라앉는 환자들이 생긴다. 일반 간호사일 때와는 다르게 수간호사라는 자리는 환자 상태에 대해 더 신경이 쓰일 것이 분명하다. 찾아오는 보호자들과 부모님의 상태를 확인하려는 전화를 일일이 다 받고 상담을 해줘야 한다. 일이 많아지니 같이 일하는 직원들이 힘들다는 불만을 토로하니 이 또한 들어줘야 한다. 밤사이 치매증상으로 잠을 안 자고 크게 혼잣말을 계속하는 환자 때문에 잠을 못 자서 일하기 피곤하다는 간병사의 불평도 있다.
일에 치이다 보니 새벽에 아침밥도 못 먹고 허둥지둥 출근하고 바빠서 점심도 못 먹고 밀린 일을 하다가 퇴근 시간을 두세 시간 넘겨 퇴근하는 날이 다반사란다. 너무 힘든 날은 집에 가서 저녁을 차려 먹는 것도 벅차다고 한다. 처음 부서장을 맡고 의욕에 넘치던 표정은 사라지고 얼굴에 피곤만 가득 내려앉았다. 오죽하면 도망가고 싶다는 생각이 들까 싶다. 안타까운 마음에 밥이라도 한 끼 같이 먹으려고 어제 퇴근 후 만나자고 약속을 잡았는데 갑자기 생긴 일을 해결하고 오느라 약속 시간보다 한 시간이나 지나서야 만날 수가 있었다.
그는 나의 편의를 봐주려고 식당에서 만나자고 했지만, 일부러 병원까지 찾아가서 기다렸다. 그리고 일산을 벗어나 심학산 아래에 있는 레스토랑으로 데려갔다. 가는 동안 저녁이 오는 가을 길을 보여주고 싶었다. 조수석을 뜨뜻하게 데워놓고 가만히 앉아서 쉬라고 했다. 몇 년 전 나도 친구의 차를 타고 이 길을 지나갔었다. 고단함과 답답함이 겹겹 들어차 있던 때였다. 먹먹한 마음으로 푸르고 시린 저녁이 내려앉는 풍경을 보았었다. 친구와 저녁을 먹고 커피를 마시며 내 속 이야기를 했다. 저녁 위로 밤이 내려앉아 세상이 온통 깜깜해질 때까지.
나는 그때 친구가 내게 했던 것처럼 그에게 저녁으로 갓 구운 화덕 피자와 짭짜름한 파스타를 사 먹였다. 그리고 통창이 넓은 카페로 자리를 옮겨 노을을 보며 같이 커피를 마셨다. 저녁 위로 밤이 내려앉아 세상이 온통 깜깜해질 때까지 그녀의 이야기를 들어 주었다.
그를 만나기 전에는 무슨 말을 해줘야 조금이나마 위로가 될까 고민했다. 힘내라는 말은 너무 식상하고 뻔하다. 요즘 부쩍 힘든 게 표가 나니 힘든 표정을 내보이지 말라고 충고를 해야 하나 싶기도 했다. 아무 말도 안 하고 들어주기만 한 건 아니다. 모든 직원의 다양한 요구를 다 들어줄 수 있는 건 아니니 그들의 불평에 상처받지 말라는 말을 했다. 욕이 배 뚫고 들어오지 않는다고 말해주었다. 내 친구가 내게 해주었던 말이다. 내가 쓰러지면 우주도 쓰러지는 것이니 밥 챙겨 먹으라는 뻔만 말도 했다. 우리는 복부지방의 뱃심으로 버터야 하는 나이라는 말도 했다. 노력이 성과가 안 보이고 당장 인정받지 못한다고 너무 기죽지 말라고도 했다.
자기 자신을 이뻐하라는 말도 덧붙였다. 매일 아침 화장대 거울을 보고 ‘아이 예뻐라’라는 말을 자기 자신에게 해주라는 말을 실감 나게 내 머리를 쓰다듬으면서 보여주었다. 그는 어이없다는 듯이 나를 쳐다보고 웃었다. 그가 웃자 나는 더 우스운 모습으로 ‘아이 예뻐라’를 보여주었다. 귀여운 소녀 인형을 하나 장만해서 화장대에 앉혀놓고 쓰다듬어 주고 구체적으로 오늘은 무엇 무엇을 잘했다고 칭찬해주라고 했다. 처음에는 민망한 듯 웃기만 한다. 나도 몇 년 전에는 이렇게 뻔뻔한 말 못 했다고 하자 못 믿겠다는 표정이다. 인생은 다 연습이라고 자기 칭찬도 해야 는다고 하자 맞는 말이라며 해볼까 싶은 표정으로 변한다.
돌아오는 길 그는 내게 얘기를 들어주어서 고맙다고 한다. 누군가에게 답답한 마음을 털어놓고 보니 속이 좀 풀렸다고 한다. 그를 보내고 인터넷 쇼핑몰에서 인형을 하나 주문했다. 수줍어하는 그를 생각해서 작은 것으로 선택하려다가 40센티 크기의 제법 큰 인형으로 골랐다. 눈에 잘 보여야 자주 하게 되고 익숙해진다.
초록색 모자와 초록색 원피스를 입은 헝겊 인형이다. 갈색 머리를 양 갈래로 쫑쫑 땋고 동그랗고 귀여운 얼굴로 웃는 모습이다. 쇼핑몰 설명을 보니 어린이를 위한 ‘애착 인형’이란다. 딱 안성맞춤이다. 어른도 자기 안의 ‘아이’를 불러내 외로움을 안아주고 슬픔을 달래주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 내가 내 기쁨을 보아주고 자랑을 칭찬해주고 싶을 때가 있으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