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가을날이었다. 친구와 둘이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 전날 저녁 갑자기 내린 비로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우리는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여진 호수 길을 걸었다. “와, 좋다, 이쁘다.” 연발하며 한 시간쯤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때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들도 산책을 나왔는지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그 나이 또래의 젊은 연인들이 하듯이 팔짱을 끼거나 발랄하게 웃거나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잔잔하게 예뻤다.
“난 스무 살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살았단다.” 물끄러미 젊은 연인을 바라보던 친구가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 오래 사귀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의 스무 살 그때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또 그 얘기를 하는군.’ 속으로 생각하며 무심하게 들었다. 내 눈앞에 울긋불긋 오색으로 화려해진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때였던 것 같아. 요 몇 년 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많이 지워졌지만 말이야.”라며 친구는 말을 이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니,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하지.’ 건성건성 들으면서 햇살로 반짝이는 호수를 쳐다보다가 뜨겁고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쌉싸름한 향을 음미했다.
“ 그 선배를 만나러 춘천을 갔다가 기차를 놓쳤거든. 선배랑 선배 친구들이랑 같이 밤을 새우고 새벽에 기차를 타러 나갔었어. 사람 없는 새벽길을 둘이 걸으며 선배가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더라.” 나는 비가 갠 높고 푸르고 맑은 하늘을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 나이 때 연애는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
“그 길이 잊히지 않아. 한참을 손을 잡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사람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는데 그날 그 새벽길이 너무 또렷이 생각나” 친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가슴속이 찌릿해졌다. 먹먹해졌다. 죄어오더니 결국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는 친구를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울음이 터져 숨을 꾹꾹 누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친구가 애인과 걸었던 그 길을 본 적도 없고 그녀의 남자 친구를 본 적도 없다. 그 시절 친구의 사랑과 이별을 곁에서 지켜보지도 않았다. 단지 친구의 ‘그 시간이 잊히지 않는다’라는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그 말에 이미 사라졌던 나의 어떤 시간이 되돌아서 달려왔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쿵 부딪히게 되면서 심장 언저리가 아팠다.
그해의 가을은 가고 여기 올해의 봄이 있다. 스무 살이 가고 어느 틈에 쉰 살이 왔다. 오늘 하늘은 지난 가을날처럼 높고 파랗다. 푸르름이 쑥 가슴으로 스민다. 가슴이 뻐근하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이고 흐른다. 맴돌다 흘러간다. 그리고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입자들이 모여 방울방울 내려앉는다. 마치 어젯밤 내린 비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