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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May 26. 2022

순환하는 시간

  

어느 가을날이었다. 친구와 둘이 공원으로 산책하러 갔다. 전날 저녁 갑자기 내린 비로 하늘은 푸르고 공기는 맑았다. 우리는 단풍으로 아름답게 물들여진 호수 길을 걸었다. “와, 좋다, 이쁘다.” 연발하며 한 시간쯤을 걷다가 벤치에 앉아 커피를 마셨다. 그때 이십 대 초반으로 보이는 젊은 남녀가 우리 앞을 지나갔다. 그들도 산책을 나왔는지 편한 운동복 차림이었다. 그들은 그 나이 또래의 젊은 연인들이 하듯이 팔짱을 끼거나 발랄하게 웃거나 하지 않았다. 서로 눈을 마주치며 조용조용히 이야기를 나누며 천천히 걷고 있었다. 그 모습이 잔잔하게 예뻤다.     


“난 스무 살을 아주 오랫동안 품고 살았단다.” 물끄러미 젊은 연인을 바라보던 친구가 고등학교 때부터 대학 졸업 무렵까지 오래 사귀었던 첫사랑 이야기를 꺼냈다. 친구의 스무 살 그때의 사랑 이야기를 처음 듣는 것이 아니었다. ‘또 그 얘기를 하는군.’ 속으로 생각하며 무심하게 들었다. 내 눈앞에 울긋불긋 오색으로 화려해진 나무들을 감상하면서.     

“그때가 내 인생의 가장 빛나던 때였던 것 같아. 요 몇 년 동안 사는 게 너무 힘들어서 지금은 많이 지워졌지만 말이야.”라며 친구는 말을 이었다. ‘이십 년도 더 지난 일이니, 기억이 흐려지는 것은 당연하지.’ 건성건성 들으면서 햇살로 반짝이는 호수를 쳐다보다가 뜨겁고 진한 커피를 한 모금 마시면서 쌉싸름한 향을 음미했다.     

“ 그 선배를 만나러 춘천을 갔다가 기차를 놓쳤거든. 선배랑 선배 친구들이랑 같이 밤을 새우고 새벽에 기차를 타러 나갔었어. 사람 없는 새벽길을 둘이 걸으며 선배가 ‘이 길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라고 말하더라.” 나는 비가 갠 높고 푸르고 맑은 하늘을 감탄하는 중이었다. ‘그 나이 때 연애는 다 그렇지.’라고 생각하면서.     

“그 길이 잊히지 않아. 한참을 손을 잡고 걸으면서 이런저런 이야기도 많이 했는데 무슨 이야기를 했는지는 생각이 나지 않는데, 그 사람은 내게 사랑한다고 말해준 적도 없는데 그날 그 새벽길이 너무 또렷이 생각나” 친구가 담담하게 말했다.      


갑자기 가슴속이 찌릿해졌다. 먹먹해졌다. 죄어오더니 결국은 눈물이 주르륵 흘렀다. 내 손은 아무렇지 않은 척 빈 종이컵을 만지작거리고 있었지만, 이야기를 이어가는 친구를 바라보기 민망할 정도로 울음이 터져 숨을 꾹꾹 누르며 소리 없이 울었다. 나는 한참을 그렇게 울었다.      


친구가 애인과 걸었던 그 길을 본 적도 없고 그녀의 남자 친구를 본 적도 없다. 그 시절 친구의 사랑과 이별을 곁에서 지켜보지도 않았다. 단지 친구의 ‘그 시간이 잊히지 않는다’라는 한마디 말 때문이었다. 그 말에 이미 사라졌던 나의 어떤 시간이 되돌아서 달려왔다. 빛보다 빠른 속도로. 그것을 피하지 못하고 쿵 부딪히게 되면서 심장 언저리가 아팠다.      


그해의 가을은 가고 여기 올해의 봄이 있다. 스무 살이 가고 어느 틈에 쉰 살이 왔다. 오늘 하늘은 지난 가을날처럼 높고 파랗다. 푸르름이 쑥 가슴으로 스민다. 가슴이 뻐근하다. 시간은 사라지지 않는다. 고이고 흐른다. 맴돌다 흘러간다. 그리고 허공으로 흩어졌다가 어느 순간 다시 입자들이 모여 방울방울 내려앉는다. 마치 어젯밤 내린 비처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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