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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최희정 Jun 15. 2022

멈추어야 할 때

몇 년 전 헤이리의 어느 카페 3층에서 혼자 커피를 마시면서 책을 보고 있었다. 1층에는  브런치를 먹는 사람들이 꽤 있었고 2층과 3층에는 나처럼 혼자 온 사람들이 노트북을 앞에 놓고 있거나 책을 보거나 하고 있었다. 음악이 낮게 흐르고 한적했다.


두 사람이 내 건너편 탁자에 앉았다. 한 사람은 쉰보다 젊어 보였으며 한 사람은 쉰을 한참 넘어 보였다. 두 사람 다 고급스러운 원피스를 입고 좋은 가방을 들었다. 예전에 같이 직장생활을 하던 사이로 보였다. 카페 안이 조용하다 보니 언듯 언 듯 그들의 말소리가 들렸다. 나이 든 사람이 누군가의 안부를 묻고 그분은 여전히 활력 넘치게 일을 하신다는 대답이 들리고 둘이 같이 웃는 소리가 들렸다. 두 사람의 대화는 영화 이야기로 이어졌다. 같이 영화를 본 모양이었다. 영화 포스터를 보면서 좋았던 장면을 얘기하고 감독의 다른 작품도 얘기하고 출연한 배우들에 대한 얘기도 나왔다. 그들은 다른 영화들에 대해서도 이야기를 했는데 영화에 대해 많이 아는 사람들 같았다. 그들의 대화는 편안하고 자연스러웠다.


선생님은 요즘 어떻게 지내셔요, 명절이라 좀 바빴어요. 아들이 애들 데리고 왔다 가서 치다꺼리하느라고요. 이때까지만 해도 대화는 부드러웠다. 잠깐  정적이 흘렀다. 걔는 이번 명절에도 하는 짓이 변함없어요. 내 아들이 같이 살고 있으니 내가 참는 거죠. 다시 또 정적이 흘렀다. 솔직히 당장이라도 이혼했으면 좋겠어요. 나이가 꽤 있어 보이는 여성이 며느리에 대한 하소연을 하는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듣는 상대 여성은 살짝 안타까운 표정을 짓기도 하고 그러셨군요 하면서 추임새를 넣기도 했다. 대화 사이에 말줄임표 같은 정적이 몇 번 흐르고 쉼표 같은 멈칫거림이 몇 번 반복되었지만 그녀는 며느리 때문에 자기가 얼마나 속상한지에 관해 얘기를 계속했다. 듣는 사람의 표정에 살짝 난감함이 보였지만 말하는 사람은 이미 그 표정을 볼 수 없는 감정의 혼탁함에 빠져있었다.


책을 읽는 척 그녀들의 이야기를 훔쳐 들으면서 겉보기에 우아한 시어머니도 며느리 불만은 노인정에 모인 할머니들과 다를 게 없다는 생각을 하면서 속으로 킥킥 몰래 웃고 있을 때였다. 아니 글쎄 그 년이! 격분한 목소리가 들렸다. 낮고 짧았지만 분명 그년이라는 막말이었다. 화들짝 놀라 나도 몰래 고개를 번쩍 들었다가 이야기를 듣고 있던 사람의 당황스러운 표정과 마주쳤다. 얼른 시선을 돌리다가 분노에 가득 찬 눈빛을 보았다.


한 사람의 입에서 자제심의 끈이 풀린  말들이 분노의 눈가리개를 달고 거침없이 달려 나오고 있었다. 입술이 바르르 떨렸고 표정은 일그러져 있었다. 상대방은 막막한 표정이었다. 들리는 것을 듣고 싶어 하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러다가 지치고 실망한 표정으로 변했다. 그러나 이미 자기감정에 휩쓸린 사람의 입은 멈추지 않았다. 말하는 사람이나 듣는 사람 모두 힘들어 보였다. 말은 바람에 섞인 모래알처럼 허공을 돌아다니면서 말하는 사람과 듣는 사람 모두를 따갑게 상처 내고 있었다. 심지어 구경꾼인 나에게도 상처를 내고 있었다. 눈에 티끌이 들어와 눈이 따가운 것처럼 귓속이 따끔따끔했다. 할 수 없이 짐을 챙겨 카페를 나왔다.


나도 누군가에게 누군가를 저렇게 격한 감정으로 비난한 적이 있었다. 내 딴에는 하소연이고 속상함을 뱉어내는 일이었지만 감정이 격하게 표현될수록 말하는 나나 듣는 사람이나 둘 다 감정의 뻑뻑함에 편하지가 않았었다. 넘치면 부족함만 못하다고 했다. 공감이  담기는 그릇은 계영배라서 너무 넘치게 담으면 다 빠져나가고  공허함만 남는다. 공허함만 더 커져서 내게 돌아온다.


내 하소연이 내 속상함이 다시 내게 돌아와 나를 겨눌 때 그때는 멈추어야 할 때이다. 그때를 놓치면 내 감정에 돋은 가시에 내가 다친다. 내 감정의 출렁임에 내 숨통이 막힌다. 멈추지 않으면 내가 더 힘들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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