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젯밤 집에 돌아오는 길에 비가 내렸다. 갑자기 거세진 빗줄기에 시야가 흐려졌다. 와이퍼가 빠르게 빗물을 닦아냈지만 길은 보이다가 보이지 않곤 했다. 그러나 달리는 차를 멈출 수는 없었다. 계속 달렸다.
집에 도착했을 때는 비가 그쳤다. 별일 없이 도착했다는 다행감으로 편안한 잠을 잤다. 아침에 일어나니 날이 좋았다. 먼지가 씻겨간 나무에서 신선한 초록이 눈으로 코로 달려들었다. 신난다. 차를 달려 헤이리로 영화를 보러 갔다. 2000년에 개봉했다가 올해 리마스터링 된 ‘화양연화’
우리 영화 '봄날은 간다'에 '라면 먹고 갈래요?'가 있다면 홍콩 영화 '화양연화'에는 '국수 사러 가요'가 있다. 사랑을 사랑이 아닌 것처럼 숨기기 위해서 휘장처럼 출렁이는 면발이 필요한가 보다.
'이것은 비밀에 관한 이야기다'라는 말로 영화는 시작한다. 비밀은 무슨 색일까? 어떤 비밀은 빨강이다. 영화 '화양연화'처럼.
5월은 철쭉으로 시작했다. 혼몽한 붉음이 길을 가로막았다. 그 붉은 덩어리에 발길이 걸려 꽃 아래 주저앉아 울었던가. 그랬던 것 같다.
느꺼움을 삼키고 잠이 들었던 밤 잠시 비가 내렸었다. 비가 그치자 가벼웠다. 나는 가볍게 꽃잎처럼 흔들리다가 나뭇잎처럼 출렁거리다가 물결처럼 맴돌기로 했다. 그러기로 했다.
5월이 무르익고 철쭉이 진 자리에 모란이 피었다. 아침의 모란은 꽃이 아닌 것처럼 초록의 단단한 덩어리였다가, 한낮의 햇볕에 자지러지게 피었다가, 해가 지기도 전에 아찔하게 떨어져 내렸다. 뚝... 뚝... 뚝.
봐요, 떨어질 때는 이렇게 화르륵 사라지는 거예요. 꽃잎들이 추락하며 웃었다. 땅이 검붉게 흔들렸다. 바람이 불자 날개를 잃은 깃털 같은 꽃잎들이 날아올랐다. 사라졌다.
그렇지, 지고 말면 그뿐. 그뿐인 거지.
그렇게 5월이 가고 있다. 화양연화 그 붉은 비밀과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