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들이 수상하다

우먼타임스 2022.06.21

by 최희정

아들이 으슥한 밤에 전화기를 들고 밖으로 나간다. 나가서 한두 시간을 들어오지 않는다. 어느 날 살짝 뒤쫓아 가보니 놀이터 옆 벤치에 앉아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다. 통화를 하면서 쑥스러운 웃음을 흘리고 있다. 표정이 달달하다.


아들이 요즘 수상하다. 자꾸 씻는다. 공을 들여 세수하고 화장수를 꼼꼼하게 바른다, 남성용 수분크림도 바른다. 눈썹 손질도 한다. 메이크업 베이스라는 피부색을 고르게 해주는 화장품도 바른다. 이십 대 초반 남성이 사용하는 향수에 관심을 보이기도 한다. 얼굴이 환하다. 요즘은 화장하는 남성도 꽤 있지만, 그런 것엔 관심이 전혀 없던 아이였다.


태도와 말이 달라졌다. 얼마 전에 돈가스가 먹고 싶다고 해 둘이 외식을 했는데 다 먹고는 맛있게 먹었다고 내게 안 하던 치사를 한다. 커피는 자기가 사겠다는 말도 덧붙인다. 평소에 무뚝뚝하던 아들이 스윽 내 어깨에 손을 얹는다. 말투와 태도가 다정하다.


무엇이 아들을 달라지게 했을까? 설렘이다. 아들에게 요즘 좋아하는 사람이 생긴 것 같다. 사랑을 시작하는 사람들에게 흔히 볼 수 있는 오래 전화하기, 공들여 꾸미기, 다정하게 말하기 등등. 누가 봐도 연애를 시작한 표가 나는 아들의 변화를 모른 척하면서 옆 눈으로 흘긋흘긋 바라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그런 모습을 구경하다 보니 괜히 나도 설렌다. 아들이 만든 반짝이는 감정의 입자가 집안을 맴돌다가 팅, 내 이마를 두드리고 갔다. 문득 내가 설렜던 순간들이 떠올랐다. 나도 그랬다. 아들과 같은 이십 대에 연애하면서 설렘을 느꼈었다. 연애는 한 번뿐이 아니었으니 여러 번의 설레는 순간이 있었다.


그렇게 청춘이 지나고 결혼을 하고 육아와 살림에 묻혀 살면서 그 감정은 사라졌다. 중년의 나이에 접어들고 그저 그렇게 반복되는 일상에서 마음 두근거리는 일은 생기지 않았다. 가슴이 쿵쿵 찌릿찌릿하는 감정은 이제 사라졌다고 생각했다.


작년 봄이었다. 누군가와 밥을 먹고 와인을 한 잔 마시고 주변 공원을 거닐었다. 그리고 벤치에 앉아 이런저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밤하늘에는 보름달이 떠있었고 바람은 따뜻하게 불어왔다. 심장이 살랑거렸다. 아주 잠깐 그랬다. 잊고 있던, 이제는 내 것이 아니라고 생각했던 무언가가 사르르 피를 타고 흘렀다. 감정의 구슬이 마음속을 이리저리 데굴데굴 굴러다녔다. 나도 예기치 못했던 일이라 어리둥절하고 당황스러웠다. 감정을 들킬까봐 민망하고 난감했다. 하지만 난 '바보처럼' 곧 일상으로 돌아오고 말았다.


돌이켜 보니, 그때 내가 느꼈던 감정의 출렁임은 사람이라면 누구나 언제든지 생길 수 있는 자연스러운 것이다. 나이가 많다고 해서 사랑을 느끼지 못하는 것은 아니니까. 나이 든 사람의 사랑이 부끄러울 이유는 없으니까. 사랑은 사랑이니까.



일본 노인 요양원 협회가 공모했다는 ‘하이쿠’ 우수작 중에 ‘사랑인 줄 알았건만 부정맥’이라는 짧은 시가 있다. ‘부정맥’은 심장박동이 갑자기 빨라지는 증상을 보이는데, 사랑을 시작한 사람들의 심장이 두근거리는 증상과 비슷하다. 노년도 사랑이 시작될 때는 두근거림이 청춘과 다를 바 없다고 말하는 재치있는 한 줄 시다.


몇 년 전 라디오에서 흘러나온 아흔 살 할머니의 사랑 이야기가 떠오른다. 중년의 딸이 보낸 사연이었다. 노모가 최근 들어 소녀처럼 수줍고 환하게 표정이 변하더란다. 딸의 립스틱을 가져다 거울을 보며 입술을 곱게 물들이기도 하고, 서랍 속에 잠자던 꽃무늬 블라우스를 입고 있는 날도 있다고 한다. 어머니는 ‘그이’가 온다고 해서 기다리는 중이라고 하셨단다. 어제도 그이가 장미 꽃다발을 들고 왔다고 방에 놓인 화병을 가리키시더란다. 화병 속에는 딸이 며칠 전 사 온 꽃이 꽂혀 있었다.


나는 이 이야기가 듣다가 길가에 차를 멈추고 한참을 있었다. 젊어서 남편을 잃고 홀로 장사를 하고 식당을 운영하며 네 명의 자식을 키워낸 구순의 치매 노인에게 찾아온 설렘이었다. 내외가 유난하고 남편 없는 여성의 사랑을 눈 흘겨보던 시절, 엄마로만 살면서도 가슴 속에 남은 순수한 설렘의 씨앗이 정신이 혼미한 아흔에 싹이 터 버린 것이다. 그게 병중에 찾아온 게 안타까웠다. 그날 운전하기가 먹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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