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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Dec 30. 2021

살아서도 죽어서도 있고 싶은 곳

71. 5R 9일차_7th: <순창편>3.호남의 승지 4.숙연함이 앞서다

3. 호남의 승지이자 판소리의 고향


앞뒤 도로에 낀 자연마을

   고갯마루에 오르니 차들이 쉬어 가는 졸음 쉼터가 있고 반갑게도 4각 정자도 설치돼 있다. 더위에 지친 몸을 쉬어 보지만, 쉼터가 두 도로 한가운데 있어 사막 같은 열기가 사방에서 밀려든다.

   고개를 내려서는 국도 가에 아미산 아래 첫 동네 백야마을이 나타난다. 마을 바로 앞으로는 순창광주간 국도가 지나가고, 마을 100여 m 뒤 언덕 쪽으로는 대구광주고속도로가 지나가 마을이 두 큰 도로 사이에 낀 형국이 되어 있다. 오랜 자연마을이 국토의 젖줄 국도와 고속도로를 위해 천혜의 자연환경을 기꺼이 희생한 모습이다.


하얀 눈을 보며 살던 고장

   이 백야마을과 함께 순창 고추장마을, 백산마을, 신천마을 등 네 마을로 이뤄진 백산리는 근동에 고인돌, 고분 등이 있어 삼국시대 이전부터 사람이 살던 오랜 고장으로 추정된다. 그만큼 살기에 좋은 지리적 조건을 갖추고 있다는 얘기이다.

   백산리는 산에 둘러싸여 하얀 눈을 보며 살던 이기도 하다. 아미산 북쪽에 형성된 고장이라 겨울에 산을 보면 항상 하얀 눈이 쌓여 봄이 되어서야 녹기 때문에 ‘산이 하얗다’고 백산리白山里가 되었다. 백야마을도 “하얗다”(白也) 하여 이름 지어졌다.


호남의 승지

   순창은 백산리를 포함한 순창읍 지역이 순창군의 중심부를 이루고 사방으로 옛 고장들이 자리하고 있는, 전라북도 동남부의 산간 분지에 자리 잡은 고장이다. 전라남도까지는 평야지대가 주축이었다면, 순창으로 넘어오면서부터는 산간 지대가 시작된다.

   산에 둘러싸인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불리기도 했다. 조선 전기 최고의 문장가이자 풍수와 성명에 능했던 서거정(1420~1488)은 그의 귀래정기(순창 가남리에 있는 신말주의 귀래정에 편액됨)에서 "순창은 호남의 승지로 산수의 아름다움과 전토의 풍요로움, 금어의 넉넉함이 있다"고 살기 좋은 순창을 표현했다. 풍수학자인 서울대 최창조 전 교수는 "전국에서 가장 아름다운 고장이 순창"이라고 했다.

   순창에서 발원하는 물이 한 방울도 다른 고을로 흘러가지 않고 순창 땅을 돌고 돌아 유등면 외이리 앞으로 모인 후 섬진강으로 흘러가며 전국 최고의 명승지들을 숨겨 놓고 있기 때문이다. 전국의 풍수가들이 명당처 중 한 곳으로 꼽는 고장이 바로 순창이다.


순창의 여러 하천 중 순창읍을 관통해 흐르는 경천의 모습


살아서도 죽어서도 거하기 좋은 곳

   살아서 살기도 좋고 죽어서 거하기도 좋은 곳이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순창의 이름 그대로 맑고淳 창성昌한 땅 순창은 예로부터 옥천(玉川)·순화(淳化)로 불릴 만큼 물이 맑고 순박하고 절경이 많고 인심이 후덕한 고장이다. 풍부한 농경 생산으로 경제적으로 윤택하고 자연환경이 수려하고 전국에서 내로라하는 장수 고장일 만큼 살기가 좋아 ‘생거순남(生居淳南) 사거임실(死居任實)’이라는 말이 생겼다. 살아서는 순창·남원이 좋고, 죽어서는 임실이 좋다는 말이다.

   반대로 ‘생거장성(生居長城) 사거순창(死居淳昌)’이라는 말도 있다. 살아서는 장성이 좋고, 죽어서는 순창이 좋다고 할 만큼 예부터 순창은 살기도 좋고 죽어서 묻히기에도 좋은 고장이었다.


산에 둘러싸인 순창은 하천 물이 순창 땅을 돌고 돌아 비옥한 땅을 만들고 있다.(사진은 인계면 지산리)


판소리의 고향

   이런 배경의 순창에서 소리 문화도 발달할 수 있었다. 순창은 들판에서 불리던 민요뿐 아니라 승화된 우리나라 판소리의 뿌리를 이루고 있다. 조선 후기 8대 명창 중 순창에서 3~4명의 명창을 배출한 명실상부 판소리의 본고장이다. 서편제의 창시자 박유전, 동편제의 독보적인 존재 김세종 명창, 김세종 명창의 맥을 이은 장자백 명창, 장판개 명인의 판소리의 근거지가 순창이다.

   섬진강을 중심으로 동편을 동편제, 서쪽을 서편제로 나누게 되는 중심에 순창이 있고, 판소리가 섬진강 줄기의 순창 적성강을 끼고 번성했다. 적성강 주변의 적성 매미터, 금과 삿갓데, 동계 숙대미, 복흥 마재 등에는 소리꾼들의 소리가 끊이지 않았다.

   이렇게 순창의 소리는 우리나라 판소리의 기초가 됐다. 순창의 서편제 박유전 명창의 소리와 순창의 동편제 장자백 명창의 소리가 합해져 판소리의 대명사처럼 알고 있는 보성의 소리를 만든 것이다.



4. 호기심보다 숙연함이 앞서다.


순창에 행해진 일본의 만행

   이처럼 우리나라에서 대표적으로 살기 좋은 고장이었던 순창에 최대의 시련을 안겨 준 것은 일본이었다.

   아미산에 얽힌 이야기부터 해 보자. 아미산(515m)은 순창의 중심에 호남정맥에서 갈라진 산줄기가 아미단맥을 형성하며 우뚝 솟은 산이다. 웅장한 암봉과 사방이 탁 트인 조망으로 많은 등산객이 찾는 아미산은 중아미, 소아미 등의 5개의 봉우리로 이루어졌다. 풍수지리학자 양상화씨는 서남쪽 금과 방향으로 용처럼 꿈틀거리며 뻗어 가는 산줄기에 다섯 봉우리가 첨예하게 솟아 있어 다섯 재상이 태어날 명당이라고 전한다.

   이 때문에 일제 시대 때 일본인들은 다섯 명의 재상이 나올 것을 우려해 아미산에 쇠말뚝을 박고 이를 속이기 위해 배를 매었던 산이라는 억지 이름을 만들어 배맨산으로 불렀다. 지금은 아미산(峨嵋山)으로 불리지만 원래는 아름답고 요염하게 웃는 여성의 모습을 연상시키는 매혹적인 산이란 뜻의 아미산(娥媚山)이었다.

   뭇사람의 마음을 사로잡으며 산객들을 유혹하고 울창한 숲과 웅장한 암장 모습으로 보기 드문 자연경관을 자랑하던 산을 엉뚱한 배맨산으로 탈바꿈시키고 쇠말뚝을 박아 정기마저 손상하려 한 일본인들의 심보가 괘씸하기 이를 데가 없다. 일본인은 우리 국토 전역 구석구석에 이렇게 못된 짓들을 했다.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오는 이유

   일본에 의한 순창의 가장 큰 아픔은 훨씬 이전에 있었다. 정유재란으로 재침한 일본군은 전라도 지역을 우선적으로 공격했다. 임진왜란 때의 경험을 거울 삼아 전라도 지방의 곡창지대를 확보하고 보급로를 장악하기 위해서였다.

   일본군은 1597년 8월에 남원성을 공격하여 함락시킨 후 주력 부대가 전주로 향하고 일부 부대가 순창을 두 방면(팔덕면과 순창읍내)으로 에워싸며 들어왔다. 일본군이 비홍치를 넘어 순창으로 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은 당시 배경남 순창 군수가 서둘러 도망가면서 일본군은 전투 없이 순창에 들어와 각종 만행을 저질렀다.

   군민들은 피난 짐을 꾸릴 시간도 없이 사방으로 흩어져 도망했고, 일본군은 집집마다 불을 지르고 재산을 약탈하고, 백성들을 학살했다. 군민 일부는 북쪽 구림면으로, 남쪽 아미산으로 피난하였으나 일본군은 끝까지 쫓아 가 모두 죽이는 잔인한 학살극을 벌였다.

   일본이 우리 땅과 백성을 유린한 더 할 수 없이 아픈 기억이 순창에 남아있다. 일본이 아직도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사과할 줄 모르면서 떵떵거리는 모습을 보며, 그들이 우리 땅에 저질렀던 아픔이 더 크게 다가온다.


호기심보다 숙연함이 앞서다.

   우리 조선군도 맹렬히 반격했다. 전 현감 조유(趙腬)는 일본군을 팔덕면의 광덕산에서 맞서 싸우다가 전사하였다. 풍산면의 옥출산성(玉出山城)을 지키고 있던 군병은 적에게 많은 피해를 입히기도 했지만, 고립무원의 상태에서 끝까지 항전하다 모두 전사했다. 부안 출신의 김홍원(金弘遠) 의병장이 의병 1,000여 명을 이끌고 일본군을 추격해 순창까지 와서 많은 일본군을 참획하였다. 우리 의병이 무기와 모든 것에서 열세였음에도 필승 의지와 전투력에서 일본군을 능가했음을 보여준다.

   특히 임란 초기부터 순창에서 많은 의병장이 나왔는데 김남준, 김봉학, 박춘성, 양귀생, 양사형, 조여관, 한응성, 홍함 등이 그들이다. 이 땅과 백성, 가족을 지키기 위해 자기 목숨을 버리는 것을 기꺼이 택했던 이분들의 한량없는 용기가 순창을 들어서는 길을 호기심보다는 숙연함이 앞서게 만들고 있다.



5. 전통고추장 민속마을


공사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건넨 것은

   백야마을 앞 길로 들어서서 순창 전통고추장 민속마을로 향하는 길 가에 배수로 공사가 한창이다. 배수로 안에서 한창 일하고 있는 공사 아저씨들의 옆을 지나가다, 누구든 만나면 인사하는 국토종주 원칙과 습관대로 “안녕하세요” 인사를 한다.

   깃발을 줄줄이 달고 걸어가는 우리를 아저씨들이 신기한 듯 올려다보며, “어디서 왔어요?” 하신다.


“서울에서 국토종주 왔습니다.”

“수고들 많네요”


하시더니 아저씨들이 힘든 일 중에 먹을 간식거리로 갖고 계시던 매실 음료와 곰보빵을 선뜻 우리에게 건네주신다. 하염없이 걷다 보면 늘 배가 고픈 우리는 철없이 넙죽 그 소중한 간식을 받아 들었다.

   마음은 주고받는 행동을 통해 전달되고 확인된다. 생면부지의 처음 보는 아저씨들이 우리에게 건넨 것은 빵이 아니라 마음이었다. 국토 순례에 대한 응원이었고, 순창을 걷는 것에 대한 칭찬이었다. 공사 아저씨들께 감사의 마음을 전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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