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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Jan 20. 2022

해질녘의 적성강가를 걷다

75. 5R 9일차_11th: <순창편> 9.강가 마을 10. 적성강가

9. 섬진강가 자연마을


붉은 백일홍이 아름다웠던 화탄마을

  섬진강을 건너 소나무가 있는 둔덕에서 강 상류 방향으로 좌회전해 걷는다. 국토종주를 떠나기 전 우리 땅의 바람 한줄기까지 궁금했던 나는 이런 길을 걸을 때 참 신선하다. 평범한 길처럼 보여도 모든 길은 자기만의 개성이 있다. 강 둔덕의 소나무 군락과 풀밭 사이의 자연하천을 보며 걷는 자체만으로 힐링의 순간이다.

  이 길은 화탄마을의  둔덕길이다. 백일홍이 빨갛게 피어 섬진강 여울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 해서 마을 이름이 화탄(花灘)이 되었다. 담양에서 걸었던 자미탄이 생각난다. 배롱나무의 붉은 백일홍이 핀 여울이라는 뜻에서 배롱나무의 한자어인 자미(紫薇)를  자미탄이었다. 이곳은 화탄, 단순히 '꽃여울'이라고 표현했지만 기실은 이곳 강가에도 붉은 백일홍이 핀 아름다움이 강렬했으리라. 지금은 백일홍을 볼 수 없지만 마을 이름에서 자연과 벗한 옛사람들의 풍류를 엿본다.


소나무 사이로 우리가 건너온 화탄잠수교와 섬진강이 보인다.(좌) 화탄마을 강 둔덕길로 걷는다.(우)


성삼문이 사랑했던 백일홍

  절의의 상징적 인물 성삼문(1418~1456)은 백일홍을 특히 사랑했다.


지난 저녁 꽃 한 송이 떨어지고(昨夕一花衰)

오늘 아침에 한 송이 피어서(今朝一花開)

서로 일백일을 바라보니(相看一百日)

너를 대하여 좋게 한잔하리라(對爾好衡盃)

- <백일홍> 성삼문


   한 송이가 아니라 나무 전체가 피고지고를 반복하며 붉은 꽃을 100일 동안 피우는 것에 자신의 인생철학을 빗대고 있다. 훈민정음 창제에 크게 공헌한 성삼문은 충(忠)을 말할 때 조선 제일의 인물이다. 공자가 <논어>에서 신하가 임금을 섬기는 자세로 언급한 충은 '치우치지 않는 마음', '자신의 마음을 다하는 것'을 뜻한다. 즉, 충은 신하의 임금에 대한 태도만이 아니라 삶의 태도를 의미한다. 누구든 사람에 대한 가장 올바른 태도가 바로 충이다. 그래서 옳을 의(義) 자를 붙인 충의(忠義)를 같이 쓰기도 한다. 성삼문은 세조를 한 번도 임금으로 인정하지 않았다. 세조가 충을 배반했고 임금 자리에 정상적으로 오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붉은 꽃을 백일 동안 마주하는 행복

    성삼문은 21세 식년문과 급제, 29세에 문과중시에 장원급제하였고, 세종에 의해 집현전 학사로 발탁돼 38세에 승지의 자리까지 오를 만큼 타고난 자질이 준수하고 문명이 높았다. 계유정난(1443)을 일으켰던 수양대군이 어린 조카인 단종을 위협, 왕위를 찬탈(1445)한 이듬해에 단종 복위를 계획하다 발각되어 모진 고문 끝에 능지처참을 당하므로 38세의 젊은 나이에 아까운 생을 마감해야 했다. 수레에 팔다리와 목을 매달아 소를 달리게 해 죽이는 거열형으로 진행됐다. 성삼문의 몸은 갈기갈기 찢겨졌다. 성삼문은 세조에게 친국을 당할 때 세조를 가리켜 ‘나리’라 호칭하고 떳떳하게 모의 사실을 시인하면서 세조가 준 녹(祿)은 창고에 쌓아두었으니 모두 가져가라 하였다.

   모진 고문을 당했지만 조금도 굴하지 않으면서 세조의 불의를 나무라고, 신숙주에게는 세종과 문종의 당부를 배신한 불충을 크게 꾸짖었다. 기개와 절의의 상징적 인물로서 성삼문은 지금도 국민들의 숭앙의 대상이 되고 있다. 그의 아버지 성승과 세 동생과 네 아들, 막내아들인 갓난아이까지 모두 죽음을 당해 혈손이 끊겼다. 모든 것을 잃고 극한의 고통을 당할 만큼 충은 그에게 절대적인 가치였다.

   그가 지켜낸  만큼이나 삶을 진실하고 진지하게 대했던 명석하고 맑은 기개의 성삼문이 배롱나무를 좋아했던 것도 절의의 상징인 붉은 꽃을 백일 동안 마주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배롱나무의 붉은 꽃은 자신의 단종을 향한 마음, 진심에서 우러나오는 변치 않는 마음인 일편단심(一片丹心; 하나의 붉은 마음)을 뜻했기 때문이다.


사람길을 걷는 열린 마음

   탄마을 옆으로는 달빛이 여울에 비치는 모습이 아름답다는 뜻의 달여울마을, 한자로 월탄(月灘)마을이 있고, 이 길 따라 쭉 걸어가면 풍요로운 섬진강이 마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흘러 근심이 없다는 뜻의 무수(無愁)마을이 있다. 이 세 마을을 합해 무수리라는 법정리가 되어 있다.

   둔덕 길을 따라 쭉 걸어가다 보니 길이 풀숲 한가운데 멈춰 있다. 하는 수 없이 풀숲 비탈을 올라 옆의 유화로로 올라서는데, 그 잠깐 새 단원들이 풀속에서 고사리를 캐고 있다.

   단원들은 길이 끊기거나 없어져도 당황하는 기색이 없다. 길이 있든 없든, 숲, 들, 강, 산 어디서든 지금 내가 있는 곳의 순간순간을 만끽하는 이런 마음이 국토종주를 완주할 수 있게 만든 힘이다. 이것이 사람길을 걷는 열린 마음이다. 사람길로 국토종주를 시작할 때부터 각오하고 다짐했던 것이 다양한 길과 환경 속에 들어가서 경험하고 느끼고자 했던 열린 마음이었기에 하루 종일 걸어도 즐거울 수 있다.


잠깐 풀숲 비탈을 오르는 사이 고사리가 한줌(좌), 유적교를 건너기 전 섬진강 모습, 강물 속의 사람도 자연과 하나가 되어 있다.(우)


10. 해질녘의 적성 강변을 걷다


해질녘 적성강변을 걷다

   길은 섬진강 둑방길이 되어 강 옆으로 이어진다. 해질녘의 아름다운 자연하천을 보며 걷는 기분이 너무 상쾌하다. 


잠시 멈추어서서 아름다운 섬진강을 배경으로 한컷

 

   유적교로 강을 건너는데 마침 해가 산을 넘어가기 직전이라 하늘과 들, 우리들까지 붉게 물들이고 있다. 강 한가운데라 더욱 세상이 노을빛에 물들어 있는 것만 같다.

   강을 건너 반대쪽 둑방길을 따라 걷는다. 오른쪽 옆으로는 적성강으로 불리는 맑은 섬진강이 넓게 흐르고 있다. 섬진강은 이곳 적성면을 흐르는 동안 지명을 딴 적성강이란 이름을 얻는다. 적성면의 지명은 이곳 채계산의 붉은 진달래가 유명해 유래되었다. 



유적교로 섬진강을 건너는 길에 해가 지고 있다.



비녀를 꽂은 여인이 누워 달을 보며 창을 읊다

   지금 걷고 있는 둑방길에서 볼 때 강 건너엔 그 유명한 채계산(342m)이 있다. 채계산의 동쪽 경사면이 섬진강 물에 잠겨 있어 적성강과 함께 더욱 아름다운 경관을 자아낸다. 

   채계산은 주탑이 없는 현수교로 국내 최장의 출렁다리를 설치한 뒤 관광지로도 각광받고 있지만  자체로도 예부터 명성이 높은 산이다. 

   채계산의 고시된 원래 지명은 화산(華山)이다. 화산 옹바위 전설이 있는데, 산의 들머리인 산기슭에 30m의 백발노인이 우뚝 서서 내려다보고 있는 모습의 바위가 있어, 이 지역에 풍년과 흉년 그리고 자연재해 등으로 좋은 일과 좋지 않은 일이 있을 때마다 이 백발 바위의 색깔이 바뀐다는 이야기가 전해온다. 

   채계산(釵笄山)이란 이름은 적성 강변의 매미터에서 동쪽을 바라보면 마치 비녀를 꽂은 여인이 누워서 달을 보며 창을 읊는 모습인 월하미인(月下美人)의 형상을 하고 있다고 해서 지어졌다. 앞서 언급했듯 매미터에서는 동편제와 서편제를 아우르는 소리꾼들이 많이 나왔고 이곳 적성강에 배를 띄우고 풍류를 즐겼다.

   채계산 등산을 한다면 적성강을 끼고 직선으로 뻗은 말갈기 같은 암릉과 그 위 수직 칼바위와 송림이 어우러진 암릉 능선을 걸으며 최고의 비경을 맛볼 수 있다. 일제강점기에 못된 일본인들은 이 채계산에도 우리의 민족정기를 말살하기 위해 쇠말뚝을 박았다.  

   계절의 여왕 5월에 푸른 적성강가를 걷는 맛이 더욱 신선하다. 어디선가 춘향가 한 자락이 메아리치는 듯하다.


강 건너편 둑방길로 걷기를 이어가는 앞에 채계산이 보인다.
채계산 자락을 품은 적성강에선 소리 한 가락이 들려오는 듯하다.



현대사의 증인, 적성교

   강변 걷기를 마치고 원촌삼거리 쪽으로 들어서려는데 바로 옆에 나좀 봐달라는 듯 교각이 옛스런 옛 다리 하나가 보인다. 한국 현대사의 산 증인인 적성교다. 

   한국전쟁 때 북한군이 남침해 순창 지역까지 밀고 내려오자 퇴로와 보급로를 차단하기 위해 미군 폭격기 B29가 다리 상판 2칸을 폭파하고 바로 앞에 절벽처럼 버티고 서 있는 채계산에 부딪혀 산화했다. 일제 때는 순창에서 수탈한 물자를 남원으로 실어 나르는 통로이기도 했다. 

   지금은 그 옆으로 4차선의 제2적성교가 놓여 옛 증거물의 보호자인 양 서 있다. 옛 적성교를 건너 일광사 앞으로 가던 구 도로는 섬진강 종주 자전거 길로 이용되고 있다. 


한국의 국민 정서 보리밭 사잇길

   원촌삼거리를 지나 적성로로 들어서는 순간 초록 청보리밭이 끝도 없이 이어진다. 해는 산너머로 방금 모습을 감췄지만 하늘은 노을빛에 물들어 있고, 청보리는 신선한 저녁 바람에 더욱 짓푸르게 하늘거린다.

   보리밭 하면 박화목 작사의 "보리밭 사잇길로 걸어가면 뉘 부르는 소리 있어"로 시작하<보리밭> 가곡이 가장 먼저 생각난다. 가사 속의 보리밭은 그리움이다. 황해도 긴내마을에서 태어난 박화목은 어린 시절 어머니 손을 잡고 밖에 나갔다가 집 가까이로 오면, 산등성이 길을 넘어 눈앞에 펼쳐지는 보리밭을 봤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향토정서와 한민족의 애수로 담아낸 것이다. 유럽에서 활약하며 세계 정상에 오른 조수미 씨도 조국과 고향에 대한 그리움이 사무쳤다. 영국의 가장 큰 음반회사와 레코드 계약을 할 때 보리밭을 넣는 조건을 내세우고, 재킷에도 한글 제목 '보리밭'을 넣게 했다던 일화는 유명하다.

   그만큼 '보리밭'은 서민적이고 소박한 서정성, 그리고 애틋한 그리움으로 한국인 모두의 정서를 대변해 준다. 가사 내용 대로 저녁 노을이 지고 있는 정감 어린 보리밭을 그냥 지나칠 수 없어 너도나도 사진 한컷을 남기려 청보리밭 속으로 몸을 숨긴다.

   밭 너머 멀리서 연기가 피어오르는 모습이 보인다. 아이들이 들로 강으로 산으로 뛰어다니다가 밥 짓는 연기를 보고 달려가는 장면을 요즘의 시골에선 보기가 힘들다. 그러나 그 같은 시골 정서는 우리들 마음에 새겨져 있다. 보리밭길, 저녁 노을, 밥 짓는 연기, 적성강변, 우리 가락, 채계산이 어우러진 이 날의 순창의 저녁 시골 풍경은 고향의 추억처럼 지금도 가슴에 남아 있다.


끝없는 청보리밭이 하늘하늘 반겨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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