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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Feb 05. 2022

이상적인 국토의 모습을 그려보다

76. 5R 9일차_12th: <순창편>11.옛시골 12.자연속 숙소

11. 옛날 시골과 지금 시골의 차이


순창 최대 평야, 고원리 들판

   이곳이 순창군에서 가장 넓은 평야지대인 적성면 고원리 들판이다. 고원리는 채계산을 바라보며 적성강을 낀 풍요로운 평야 지대에 형 예로부터 적성면의 중심지가 다. 백제 때 역평현(礫坪縣), 후기 신라시대엔 적성현의 행정 소가 있었고, 현재도 적성면 소재지다.

   관원이 많이 배출됐다 해서 이름 붙은 관평(官坪)마을, 삼국시대부터 적성강 나루 위에 적성원(赤城院)이란 역원(驛院)이 있어 이름 붙은 원촌(院村)마을, 주변 산에서 고려장 흔적이 발견되고, 옹기를 만든 점촌의 역사가 깊은, 방죽 안 동네라는 데서 유래한 지내(池內)마을, 마을 앞에 연못이 있어서 ‘못안’으로 부르다가 변형된 모산(茅山)마을이 모두 고원리에 속한다.


적성강(좌)과 고원리 들판(우), 적성강을 낀 평야지대를 중심으로 역사 깊은 네 자연 마을이 고원리를 이루고 있다.


옛날 시골과 지금 시골 차이

   이 좋은 풍광과 깊은 역사를 가진 자연마을이 인적 없는 고요에 잠긴 모습을 보니, 옛날 시골은 지금 우리가 보는 대부분의 시골 모습처럼 하지 않았을 것이라는 생각이 갑자기 든다.

   농업이 주산업이던 옛날엔 인구가 국토에 고루 분포돼 있었다. 시골이라고 부를 수 없는 지방이었다. 옛날의 지방은 지금 같은 도시 중심 국가에서 상대적으로 소외된 개념의 지방이 아니다.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활기 띠던, 백성들의 주 생활 무대였다. 특히 강을 낀 평야지대를 따라 인구가 많이 분포했기 때문에 이곳 고원리를 보며 활력 넘치던 옛 지방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 본다.

   우리나라 역사 상 가장 많은 인구를 가진 오늘날(2021.12. 현재 남한 5,174만 5,000여 명)이지만 현재 순창의 총인구는 2만 6,855명(2021.12)밖에 안된다. 농가 인구는 더 적어 11,000여 명(41%)에 불과하다. 현재 적성면엔 1,236 명이 살고 있고 이곳 고원리엔 320여 명 정도가 살고 있다. 그나마 고원리는 면소재지여서 인구가 다른 리보다 많은데도 이렇다. 옛날에 비해 인구는 3~5배 많아졌지만 지방은 그 때보다 더 적은 인구가 살고 있다. 인구가 거의 대도시에, 지방 군에서도 군읍 소재지에 몰려 살고 있어 면 단위엔 아주 적은 인구가 살고 있는 것이다. 리로 가면 더 차이가 나 거의 노인들만 살고, 인구 소멸이 급속히 진행되고 있다. 한마디로 우리의 시골이 죽고 있다. 시골이 죽으면 오랜 역사와 전통, 문화가 같이 죽는 것이다. 국가적 대책이 시급하다.


마을의 모습을 상상해 보다

   삼국시대엔 순창이 백제 땅이었으니 백제 인구 623만 명(백제 말기 인구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일 때나 인구수 800만 명가량이던 고려 초기나 1,000만 명 안팎이던 조선 전기 때도 오랜 역사를 가진 이곳 고원리엔 많은 인구가 살았을 것이다. 인구가 지금보다 3배 적은 1,800만 명이던 조선 후기(1789) 때 순창 인구는 현재의 인구와 동일한 26,849명이었다.

   그러나 분포는 다르다. 지금은 순창 안에서도 군읍에 인구가 몰려 있고, 옛날엔 주산업이 있는 경작지를 중심으로 인구가 퍼져 있었으니 이곳 고원리 역시 지금보다 인구가 어림잡아 3배 이상 많고 활기가 넘쳤것이다.

   작황은 기술 발달로 오늘날이 더 좋겠지만 먹여 살릴 인구가 훨씬 많아 수요의 대부분을 수입해야 하는, 인구에 비해 자급자족에 턱없이 부족한 미미한 수준일 뿐이다. 특히 사람 사는 모습에서, 이웃집과 음식을 나누며 왕래하는 모습이며, 집집마다 아이들이 뛰어놀고, 시장 판과 나루에 물산이 오가고, 강가에선 뱃놀이를 하고, 들판에선 창이 울려 퍼지던 옛 마을의 모습이 그려진다.

   예나 지금이나 인구가 전 국토에 고루 퍼져서 저마다의 특색을 갖고 대를 잇는 삶의 터전으로서, 각 지방마다 다양한 삶의 이야기를 축적해갈 수 있다면 가장 이상적인 국토의 모습일 것이다.


실제 조선시대의 풍경

   조선시대 때도 적성면을 휘감아 돌며 흐르는 섬진강의 상류인 적성강(赤城江)은 채계산과 어울려 아름다운 풍광을 만들어내고, 강을 품은 들판은 풍요롭기 그지없었다. 이런 이유로 인근 남원, 임실, 옥과, 곡성 등지의 수령들은 이곳에 부임하기를 소원했다고 한다.


적성현 터는 이제 황량한 언덕이 되었건만

적성진의 물은 밤낮으로 흐르는구나

으슥한 숲 속 사당에는 소고 소리 요란하고

시장 바닥에는 시끄러이 우마가 왕래하네

눈에 가득한 운산은 장차 저물려 하는데

전답에 그득한 곡식은 정히 깊은 가을일세

멀리 보건대 앞 비탈에 삼홀 착용한 관리는

가는 깃발이 또 대방주를 향하는구나

-<적성진에서> 김종직


  조선시대 사림(士林)의 중시조로 평가받는 김종직(1431 ~ 1492)이 이곳 고원리에 있던 적성진(赤城津)에서 지은 시를 보면 조선 전기(15C) 이곳의 모습이 더 자세히 그려진다. 김종직이 살던 당시 조선의 인구는 1,000만 명 정도였지만 고원리는 지금보다 훨씬 활기가 넘친다. 적성현 터라고 한건 조선시대의 작자가 먼 옛날 통일신라 때의, 지금은 없어진 행정 처소를 떠올린 것이다. 사당의 소고 소리, 시장에 우마가 왕래하고, 곡식 익은 전답의 풍요로움과 관리가 대방주(당나라가 백제의 옛 땅에 설치한 지방조직의 하나, 실질적인 뜻보다 일종의 부대 표시에 지나지 않음)를 향하는 모습 들을 그린 것을 보면 당시 이 고장의 활기를 느끼게 한다. 



12. 적성진 터 부근의 범상치 않은 숙소


땅거미 진 보리밭 사잇길

   평야지대의 끝없는 보리밭 사잇길로 1km 정도 걸어가면 적성강가 절벽 위에 오늘의 숙소 강변민박집이 자리하고 있다. 해가 진 후 어스름한 빛에 더욱 청아한 모습으로 나풀나풀 춤추는 청보리밭 사잇길로 들녘의 산들바람을 맞으며 걷는 맛이 이리도 좋을 수가.

   개인적으로 난 하루 중 해 진 후 땅거미 진 이 시간을 가장 좋아한다. 열심히 저마다의 색으로 일하던 세상은 이 시간이 되면 자기의 색을 조금씩 내려놓는다. 반대색마저도 서로 비슷해지고 일체감을 갖는다. 길지 않은 잠깐이지만 모든 색이 조화를 찾는 시간답게 세상은 하루 중 가장 평화로운 시간을 맞는다. 복잡하거나 지저분한 광경들도 모두 함께 온 세상이 아름다운 옷으로 갈아입는다. 세상은 우리가 필요한 것, 보여줄 것만 보여 주며 마음의 여유와 쉼을 준다.

   어쩌면 우린 세상을 이렇게 살아야 하는지 모른다. 자기의 색을 약간씩 빼어 어우러지고 조화를 이루며 사는 아름다운 모습이. 복잡하게 이것저것 다 따지고 걱정하면서 살지 않고 필요한 것, 볼 것만 보면서 긍정적으로 단순하게 살면 더 행복해질 것 같다.


다시 가보고 싶은 강변민박집

   숙소에 도착했을 때도 아직 어둠이 덮이기 전이라 너른 마당과 숙소 건물들의 깔끔한 모습이 보인다. 반갑게 맞이해 주신 주인 내외 분이 우리들 저녁 식사 준비하시랴 숙소 챙겨 주시랴 바쁘시다. 숙소는 이름은 민박이지만 펜션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모든 게 좋아서 놀랍다.

   통나무 목조 주택의 멋과 단체객들이 묵기에 적합한 너른 방, 깔끔하고 뜨끈한 방, 눈앞 적성강의 경치까지 숙소로서 최고의 조건을 갖추었다. 펜션이 되려면 각 방마다 부엌이 딸려 있어야 해서 펜션 이름만 안 붙었을 뿐, 숙소 옆에는 너른 식당 건물이 따로 있는데 주인아주머니의 맛깔스럽고 푸짐하고 다양한 음식을 맛볼 수 있어 오히려 더 좋은 것 같다. 국토종주 중 들렀던 숙소 중 최고로 손꼽히는, 다시 가보고 싶은 숙소이다.


강변민박 숙소 앞 마당과 방안에서 통창으로 보이는 적성강 풍경



저녁 식사를 기다리며

   하루 종일 짊어졌던 짐을 숙소에 풀고 나니 더없이 홀가분하다. 오늘 아침 담양 소방서 앞 백두산 떡갈비 주차장에서 출발해서 죽녹원 탐방을 포함해 34km를 걸어왔다. 이로써 9일 차 국토종주가 끝났다. 특히 이번 회차는 개인적으로 더 뜻깊은 회차이다. 국토종주를 매달 두 번째 주말로 정해 놓았기 때문에 인솔자로서 빠질 수가 없어 중국 출장 중에 국토종주를 위해 잠시 와서 걸은 것이라 더 소중하게 남았다.

   저녁 식사를 기다리는 동안 숙소 뒤쪽 마당으로 가니 채계산을 돌아 흐르는 그림 같은 적성강이 바로 코앞에서 장관을 이루고 흐르고 있다. 적성강이 이렇게 넓고 큰지 놀랍고 이렇게도 고요한지 또 놀랍다. 이곳에 서니 자연과 하나가 된 기분이다. 그저 숨죽이고 태고의 위엄에 휩싸인 적성강을 바라본다.


강변민박 숙소 뒤뜰에서 본 적성강의 모습


이 민박집 부근이 적성진 터라니

   그런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경치가 범상치 않았던  진짜 이유가 있다. 공교롭게도 적성진으로 불리던 적성강 나루터가 바로 이 민박집 부근에 있었다. 적성진에서 순창과 남원 대강면을 잇는 뱃길이 열렸는데 1950년대까지도 나룻배가 다녔다.

   고려 중기 최고 문장가 이규보(李奎報)는 이곳을 다음처럼 그렸다.


술 취한 늙은이 일엽편주에 실었으니

석양에 돌아오는 행색 그림 속이로다.

평소에 화산 경치 좋다 하기에

부질없이 산봉우리를 바라보며 푸른 하늘을 가리키네.

화산이 가장 뛰어난 절경인데 마침 저물 무렵 도착했다네.

-<적성강을 건너다> 이규보


   역시 이규보이다. 석양에 물든 화산(채계산)과 적성강, 그 속에 떠오는 한 척 나룻배의 그림 같은 모습이 눈에 선하다. 자신을 술 취한 늙은이로 표현해 이곳의 절경에 빠져 저물 무렵 나루에 도착한 모습을 자연스럽게 그렸다. 끊임없이 부와 생계를 쫒아 일에 경도된 지금의 삶과 풍류를 즐길 줄 알았던 옛날의 삶이 비교된다.


걷기 후 휴식의 

   적성강이 어둠 속에 잠긴 후 너른 식당에 모여 최고의 저녁식사를 한다. 주인 내외분이 준비한 주물럭과 손수 양념하신 맛깔난 반찬들이 밥도둑이 되어 모든 하루의 피로를 잊게 한다. 너무 맛있어 내일 국토종주 때 먹을 점심 도시락을 부탁드리니 흔쾌히 좋다고 하신다.

   언제든 느끼지만 걷고 나면 진정한 휴식을 맛보게 된다. 하루 종일 걷느라 물집이 생긴 단원들도 있다. 처지와 정리를 하고 샤워를 하고 편한 실내복으로 갈아입고 나면 세상 편안해진다. 가장 편안한 상태에서 다 같이 모여 다과와 시원한 음료로 마지막 회포를 풀면 황제가 부럽지 않다.

   채계산과 적성강, 청보리밭을 바로 옆에 둔 일품 자연의 품 안에서 숙소도 단원들도 모두 깊은 잠에 빠져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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