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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iker 한영 Apr 02. 2022

정해진 길로만 가야 할까?

81. 5R 10일차_5th:<순창편>22.순창과 임실 연결하는 징검다리

22. 순창과 임실의 연결고리 징검다리


이번엔 징검다리가 안 보인다

   예전의 기억대로 징검다리를 건너려고 했지만 어린 가로수가 빼곡히 도열한 새 자전거길만 하염없이 돌아가고 있다. 강변 쪽으로는 수풀이 빼곡할 뿐 내려서는 샛길도 없고 징검다리도 보이지 않는다.


   "엇, 이럴 리가 없는데.."


   가던 길을 멈추고 다시 되돌아서 순전히 옛 기억만으로 징검다리를 찾아 길 없는 길로 내려선다. 강변에 갈대와 잡초가 뒤엉킨 수풀을 헤친다. 단원들도 평탄한 길로 신나게 걷다가 놀란 눈빛으로 따라 내려선다.

   아! 찾았다. 너무 반갑다. 5회 차 종주 걷기를 준비하던 한 달 전부터 다시 만날 생각에 설레었던 징검다리이다. 그런데 찾고 보니 이게 그 징검다리 맞나 싶을 만큼 거의 물에 잠겨 있다. 아마도 이렇게 유속이 빠른 곳의 징검다리는 오래되면 지반침식으로 서서히 내려앉는 게 아닐까 싶다. 더구나 교통이 편리해지고 자전거로 종주하는 사람들도 많아진 지금은 정해진 길을 따라갈 뿐이어서 더 이상 필요가 없어진 징검다리가 거의 방치되다시피 돼 있다.


옛 기억을 더듬어 길을 내려서서 징검다리를 찾아 수풀을 헤치고 나아간다.
드디어 찾아낸 징검다리가 물에 잠겨 보이지 않고 낙차로 생긴 물거품만 빠른 유속을 실감나게 해 준다.


정해진 길을 간다는 것

   섬진강자전거길로 정해진 길을 걷다 보니 우리 인생의 정해진 길이 연상된다. 우리들은 모두 정해진 삶을 산다. 정해진 나라에서 태어나 정해진 가족에서 자라고 정해진 학교에서 정해진 교과로 공부하고 정해진 직장을 다니며 정해진 일을 하고 산다.

   안정된 사회일수록 모든 것이 더 촘촘히 정해지고, 사람은 정해진 사회의 한 일원으로서 삶을 사는 경향이 커진다. 개성적 주체보다는 종속적 개체성이 강화되고, 그럴수록 변화와는 점점 멀어진다. 예를 들자면 안정된 공무원 사회에서 변화가 더 쉽지 않은 것과 같다.

   아주 오랜 기간에 걸쳐 인간은 모든 것을 정하고 그 안에서 정해진 삶을 사는 삶의 방식을 훈련받아 왔다. 그 결과로 인간은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삶의 방식이나 환경, 심지어 사고 체계까지를 정하고 싶어 한다. 그래야 심리적 안정감을 얻는다.

   이 같은 심리는 근원적으로 생계, 즉 생존 본능의 충족과 연관돼 있다. 정하는 것의 안정을 인류가 처음 구체적으로 성취한 것이 약 1만 년 전 신석기 시대부터였다. 삶의 터를 정하고 농작물을 재배하고 가축을 기르며 정착하면서부터 인류는 안정을 누릴 수 있었다.

   신앙도 마찬가지이다. 무지한 인간의 한계나 불가사의한 현상들, 불확실하고 불안정한 사후 문제 등에 대해 확실히 정하고 싶은 것이다. 배우자를 정할 때도 점을 보고, 운명론을 믿는 것도 '나는 몰라도 무언가 위대한 힘에 의해 정해진 것이 있을 것'이라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절대적 존재에게 내가 모르는 모든 것을 위탁함으로써 정하는 것과 같은 효과를 얻는다.

   결국 정한다는 것은 생존과 맞닿아 있다. 아마도 춘추전국시대의 맹자孟子도 이를 간파했던 것 같다. 그는 ‘항산이 있는 자가 항심이 있다有恒産者有恒心’(≪맹자≫ 동문공장滕文公章)고 말한다. 항산恒産, 즉 정해진 재산과 생업(소득)이 있을 때 안정된 정해진 마음, '인간이 늘 가지고 있어야 할 기본적인 선한 마음'이 있다는 것이다. 불교에서도 항심恒心을 '늘 지니고 있는 떳떳한 마음. 언제나 변함없이 여여如如한(같은=정해진) 마음'으로 이해한다.


새로운 도전의 시대

   그런데 이 같은 '정함=안정'이란 인간의 인지적 본능이 도전을 받기 시작했다. 언제부턴가 정하는 것이 오히려 생존을 어렵게 할 수 있다는 불안감이 엄습하고 있다. 인류는 코로나19로 이를 된통 경험했다. 지금까지 정하므로 안정을 얻었던 대면 환경에서의 삶의 방식이 오히려 생존을 위협하는 독으로 작용했다. 비대면에서 새로운 탈출구를 찾거나 내가 변하지 않으면 생존조차 불안정해졌다.

   이전부터도 갑자기 세계금융위기가 터져 상관도 없어 보이던 잘 다니던 기업이 도산하고, 지구온난화로 기상재해는 물론 생태계와 삶의 환경 자체가 바뀌고 있다. 4차산업혁명은 아예 새로운 삶의 방식을 강요한다. 급격한 변화 환경은 적응하느냐 못하느냐에 따라 세대 간을 더욱 뚜렷하게 갈라놓는다.

   우리는 지금 '정해진 길을 계속 갈 것이냐, 새로운 길을 모색할 것이냐'의 갈림길에 서 있다.

   그러나 변화는 참으로 어렵다. 여전히 대부분은 아무리 큰 변화가 일어나도 "내가 할 수 있는게 이거밖에 없어" 하고 가던 길을 갈 것이다. 자기만의 삶의 방식을 통해 안정을 얻는 것은 당연하고 중요한 것이다. 다만, 모든 게 급변하는 시대가 변화나 도전이란 화두를 옛날보다 더 많이 던지고 있다는 점만큼은 기억해야 한다.


   처음부터 겁먹지 말자. 막상 가보면 아무것도 아닌 게 세상엔 참으로 많다. 첫걸음을 떼기 전에 앞으로 나갈 수 없고, 뛰기 전엔 이길 수 없다. 너무 많이 뒤돌아보는 자는 크게 이루지 못한다.

-요한 폰 쉴러


  경주마는 목표지점을 향해 정해진 길만 가도록 훈련된다. 경마 경기를 할 때도 앞만 보고 달릴 수 있도록 말의 시야를 제한한다. 어쩌면 우리 모두 어려서부터 이렇게 정해진 길을 가도록 훈련받으며 자라왔는지 모른다. 그래서 얻은 결과물이 과연 삶의 행복을 선사해 줄까.

   이 시대를 사는 우리가 가져야 할 덕목이 있다. 바로 유연성이다. 자신의 정해진 길을 가면서도 언제나 변화와 도전을 인정하고 받아들일 유연성을 갖는 것이다. 남의 다른 삶을 인정하는 것, 다른 생각을 인정하는 것 또한 우리가 가져야 할 유연성의 범주에 있다.

   교육에서도 배움보다 경험을 중시하므로 유연성을 길러야 한다. 일방적으로 정한 것을 주입하고 달리 생각할 기회 없이 수동적으로 배우는 시대를 넘어 상호 소통의 과정과 능동적으로 선택하고 경험하는 기회로서 교육과정이 마련돼야 한다. 이제 유연성은 시대정신이 되었다.


사람길 루트를 개척해 걷는 이유

   국토종주도 찻길이든, 자전거길이든 정해진 길을 따라간다는 것은 정해진 길 밖에 있는 것에 대한 생략의 위험을 내포한다. 정해진 길을 이탈하고자 하는 뚜렷한 목적과 의지가 없다면, 또 그에 따른 새로운 수고로움을 감수하지 않는다면 그냥 정해진 길을 따라가는 것만으로 목적은 완성된다.

   그러나 걸으므로 볼 수 있는 것들, 느끼고 경험할 수 있는 것들이 정해진 길을 가야 하기 때문에 생략되도 좋을 이유는 없다. 빨리 완주하는 것만 원했다면 처음부터 사람길 국토종주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국토종주의 원래 목적은 완주 자체가 아니라 우리 땅의 풀 하나 돌 하나까지 느끼는 것이다.

   우리는 처음부터 국토순례를 단지 시간 단축의 차원에서가 아니라 우리 땅의 숨결과 우리 땅에서 사는 사람들의 삶을 접하는 소중한 기회로 삼으려 했기에 언제든 길에서 이탈할 준비가 돼 있다. 우리가 처음부터 국도를 따라 걷지 않고 사람길을 개척해 걷는 이유이다.


우리는 사람길 국토종주를 시작할 처음부터 길에서 이탈할 준비가 되어 있다.


소중한 경험으로 채운 걷기

   어렵게 찾은 징검다리는 길로 사용할 수 없을 만큼 심하게 물에 잠겨 있고 물살마저 세다. 이때를 회고한 혁이 단원의 후기를 인용해 본다. "풀숲의 돌다리 앞에서 헤매다 단장님의 발견, 귀찮게 양말, 신발 벗어야 하는 거야? 하지만 급 반전, 산책의 피로를 해결하는 시원한 시간이 되었다!!" 길 없는 수풀을 앞장서서 헤치는 혁이도 난감해했던 징검다리였는데, 신발을 벗어 들고 첨벙 물속에 발을 담그는 순간 온몸의 상쾌함이 마음의 해방감으로 번져온다.

   국토종주가 모두 끝난 지금도 기억에 남는 일은 편한 길을 이탈해서 이렇게 사람길을 찾아간 경험들이었다. 이 경험들이 우리의 도보 국토순례를 결과적으로 풍성하고 소중한 경험이 가득한 걷기로 만들어 주었다.

   시원한 자연 족욕과 함께 징검다리를 건넜다. 섬진강을 건너는 순간 두 발을 디디도록 받아준 곳은 내륙의 보석 땅 임실이다.


신발을 벗어 들고 조심조심 건넌다. 건넌 곳은 임실 땅이다.


*다음회부터 <임실> 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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