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의령관문과 의병광장ㆍ탐방일: 2022. 12. 11.
지방 곳곳을 여행하다 보면 예기치 않았던 감동이 솟구치는 때가 있다. 의령이 그랬다.
의령은 남동부로는 남강과 낙동강이, 서북부엔 자굴산(해발 897m), 국사봉(688m) 등 산간지대가 감싸고 있어 풍수지리로 볼 때 의령 전체가 하나의 배산임수의 지형을 하고 있다.
집현전 직제학을 지낸 이 고장 출신의 어변갑은 의령의 자연환경을 아래의 시로 풀었다.
봄날 흐르는 정암의 강물은 비단을 펼친 듯 푸르고, 春水鼎巖橫練碧
가을바람 부는 자굴산은 병풍을 펼친 듯 새롭네 秋風闍堀展屛新
- 어변갑(집현전 직제학)
의령으로 통하는 문 이상의 의미, 의령관문
남해고속도로 군북 IC에서 79번 국도로 약 5km를 가면 함안과 의령의 경계인 남강에 다다르고 정암교로 이 남강을 건너면 의령이다. 그런데 정암교가 끝나는 지점의 의령 쪽 남강변 도로 위에 웅장한 관문이 우뚝 서 있다. 바로 의령관문이다.
지붕은 서울 숭례문과 같은 전통 한옥 지붕 형태로 차량이 통과하는 높이 12.87m, 길이 45.17m의 거대 관문이다. 심상치 않아 보이는 겉모습 그대로 의령관문은 단순히 의령으로 들어가는 문 이상의 의미가 있다.
의령은 경상남도의 정중앙에 위치하면서 서부경남과 전라도 지역을 연결하는 요충지로 역할했는데, 의령관문이 위치한 이곳 정암진鼎巖津은 예로부터 의령으로 통하는 중부 경남의 관문이었다.
항일의병의 고장 대변하는 관문으로 역할
<신증동국여지승람>(1530)을 비롯한 지리지에는 정암진 지명을 수록하고 있는데, 정암진은 1935년 정암교(현재 정암철교)가 완공되기 전까지 차량을 비롯한 화물과 사람을 수송하던 유명한 나루였다. 나루는 교통의 결절점結節點이기 때문에 교통로를 확보하기 위한 군사적 요충지이기도 했다.
임진왜란 때 왜군이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점령하러 가려던 길목도 이곳 정암진이었다. 곽재우 의병군은 이곳에서 일전을 벌여 승리하므로 일본의 전라도 진출을 막는 단초를 마련했다. 이 때의 정암진 전투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의병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둔 전투로 알려져 있다.
의령관문은 오랜 역사의 교통 요충지로 역할해온 정암진의 역사성을 이어받은 관문이면서, 이에 더해 왜군을 상대로 한 의병 최초의 승전지 정암진에 자리한 관문이라는 점에서 중부 경남의 관문이자 항일의병의 고장 의령을 대변하는 상징적 건물이 되고 있다.
<관련 역사 이야기>
정암진 전투가 벌어진 이유
1592년 5월 23일 부산진·다대포·서생포를 동시에 공격하면서 임진왜란을 일으킨 일본은 3주도 채 안 걸린 6월 11일 한양을 점령하고 6월 26일 임진강 방어선을 뚫고 평안도와 함경도 방면으로 진격해갔다. 일본군의 북상이 빠르게 이루어진 것은 조선군의 초기 대응이 제대로 이루어지지 않았기 때문인데, 일본군이 침략해오자 관군들은 싸우지 않고 달나아기에 급급했다.
흩어진 관군을 대신해 일본군과 싸운 것은 각지에서 일어난 의병이었다.
일본군 후발대로 후방 보급로를 지키는 임무를 띠었던 제6번대는 경상우도의 각지로 부대를 진출시켰는데 일본군이 6월 26일 개성을 점령한 후에 6번대가 전라도 지역의 공략을 맡게 되었다.
의병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한 전투
이에 따라 2000명의 일본군 선봉대가 7월 4일(음력 5월 24일) 전라도로 가기 위한 길목인 정암진에 도착했다.
한편, 전쟁 발발 후 불과 10일도 안된 6월 1일 의병을 일으켜 왜군의 수송선을 공격하는 등 소규모 전투에서 승리하던 곽재우는 정암진을 향한 일본군의 이동로를 파악해 정암진에 미리 매복했다.
그리고는 직접 일본군을 유인해 일본군이 의도한 지점에 다가오자 숨겨둔 강노(한 번에 화살 여러 개를 멀리 쏠 수 있는 위력이 센 활)를 쏘아 공격했다. 강안의 지형지물을 잘 아는 곽재우는 왜군이 달아날 쪽 강기슭에 미리 장애물을 설치해 두고는,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일본군이 달아나다 장애물에 막혀 몰리자 급습해 큰 전과를 올렸다.
이것이 그 유명한 정암진 전투(대첩이라고도 부른다)이다. 임진왜란이 일어난 뒤에 의병이 최초로 일본군에 승리를 거둔 전투로 알려져 있다.
호남 지키므로 장기 항전의 기반 마련
전라도로 진출하려는 시도가 저지되자 일본군은 북상해서 다른 길을 찾았다. 곽재우 군도 같이 북상해 기강(남강과 낙동강이 합류하는 지점의 강)을 건너려던 일본군을 따라가 맞섰다. 이에 강을 건너지 못한 일본군은 다시 뱃길로 성주로 향했으나 곽재우 군은 거기까지 추격해 교전을 벌여 물리쳤다.
일본군은 호남 공략을 포기하지 않고 7월 31일 금산을 점령한 뒤 다른 쪽인 전주성으로 진격했다. 그러나 8월 13일부터 8월 14일까지 벌어진 웅치전투·이치전투에서 큰 피해를 입었고, 8월 16일에 벌어진 우척현 전투에서도 고령·거창 지방의 의병에 패하면서 결국 호남 진출이 좌절되었다.
이처럼 조선은 곽재우를 비롯한 의병과 이순신이 이끈 전라도 수군의 활약으로 곡창 지대인 호남 지역을 지켜낼 수 있게 되면서 일본군에 대해 장기 항전을 벌일 물질적 기반을 마련할 수 있었다.
의병 최초의 승전지에 세워진 의병광장
임진왜란에서 북상한 일본군의 세가 약해지고 명군과 조선군의 공격을 못 견디고 결국 왜군이 조선 땅에서 물러나게 된 데는 일본군 보급선이 남해를 돌아 서해로 올라가는 해로가 이순신에 의해 막히고, 내륙에선 곽재우 등 의병들이 낙동강 병참선을 차단하고 곡창지대인 전라도를 지킨데 있었다. 해로와 육로 어느 것도 중요하지 않은 곳이 없었다는 점에서 정암진 전투는 임진왜란에서 나라를 구한 결정적 역할을 했다고 볼 수 있다.
의령관문 옆에 곽재우 장군과 의병의 정신을 기리기 위한 의병광장이 조성돼 있다. 붉은 옷을 입은 홍의장군 곽재우 장군이 백마에 올라 호령하는 모습의 동상과 벽면 전시대 2개에 왜군들과 전투에 임하는 홍의장군을 비롯한 18장령의 비장한 모습이 부조로 새겨져 있다. 의병광장이 우리나라 의병 정신을 대표하는 전국적인 광장으로서의 의미를 동시에 갖는 이유는 의병 최초의 승전지 의령 정암진에 설치됐기 때문이다.
나라의 운명도 생각과 의지의 차이에 좌우됨을 교훈
특히 나라의 운명이 백성들에 의해 좌우될 수 있다는 것을 의령 주민들과 곽재우 장군이 유감없이 보여주었다.
모든 게 생각과 의지의 차이였다. 어떤 지방은 군수부터 도망가고 싸움 한번 없이 성을 내주어 백성들이 무참히 살상되고 유린되는가 하면, 백성들이 자기 고장을 스스로 지켜내 안전한 생활을 영위하고 일본군의 호남 공략과 병참선을 끊어 국가를 지키는 역할까지 한 의령은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우리 각자가 어떤 자세를 가져야 하는지를 알려주는 본보기이자 귀감이 되고 있다.
곽재우 장군의 거병일인 6월 1일은 '의병의 날'로 2011년 국가기념일로 제정돼 해마다 정부 주관 하에 기념식이 거행되고 있다. '의병의 날' 기념식은 전국에서 의병 활동이 일어난 것을 새기는 뜻에서 매년 장소가 달라지는데 의령은 2011년 제1회 '의병의 날' 기념식이 열린 곳이다.
의병광장이 대변하는 것처럼 의령은 항일의병의 상징적 고장으로서 역사와 정신을 이어오고 있다.
<정암루, 정암철교, 솥바위 얘기 다음 글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