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자 명당 호암 이병철 생가 방문기 1.

1편: 생가로 가는 길, 방문일: 2022.12.11.

by Hiker 나한영

의령 정곡면 장내마을엔 우리나라 최고 재벌 기업 삼성을 일군 고 호암 이병철 회장의 생가가 있다. 유년기의 환경은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주기 마련이다. 의도하고 간 것은 아니지만 이병철 회장이 나고 자란 생가엔 부자가 되도록 영향을 준 그 무엇이 있을까. 가보고 싶다.


색다른 분위기의 의령 장내마을

마을 주변의 산들이 마치 담을 둘러친 것과 같다고 해서 예로부터 장내墻內 마을로 불려졌다. 우리말로 풀면 ‘담안 마을’이다. 그래서일까 마을로 들어서는데 이상하게도 따뜻하고 포근한 느낌이 든다. 게다가 활기 있어 보이는 마을 분위기도 요즘 조용한 다른 시골 마을과 사뭇 다른 느낌이다.

장내마을은 부자마을로도 불린다. 마을 방문객들을 위한 공영주차장 이름도 부자주차장이다. 주차장만 아니라 마을의 많은 것에 '부자'라는 말이 붙어 있다. 상점 이름도 부자슈퍼, 부자매점, 부자한우 등등이고, 길 이름도 부자길이다. 조용하던 마을이 부자마을로 탈바꿈된 것은 두말할 필요 없이 이병철 생가 때문이다. 생가를 개방하고부터 사람들이 찾아오면서 마을도 활기를 띠게 됐다.


살아있는 농촌의 모습, 그 중심이 된 장내마을

정곡면사무소 안쪽의 부자주차장이 꽤 넓다. 부자의 기운을 받으러 매년 10만 명이 이병철 생가를 찾는다고 하니 주차장이 이 정도 크기는 돼야 할 것 같다.

그런데 주차장에서 처음 보는 장면을 봤다. 주차장 가운데 '공공비축벼'라고 적힌, 포대당 거의 1톤에 가까운 800kg짜리 거대한 벼 포대가 수도 없이 나열돼 있고, 포대를 실은 트럭이 계속 들어오고 있다. 주차장이 넓다 보니 이곳이 의령군의 공공비축벼 수납처가 되고 있는 것이다.

과거엔 정부가 매긴 가격으로 쌀을 매입하는 추곡수매제도가 있었지만 이를 폐지하고 2005년부터 공공비축제도를 시행하고 있다. 식량안보 차원에서 나라의 적정 재고를 유지하기 위해 정부가 시장가격으로 쌀을 매입하고 방출하는 제도이다. 올해 말까지 정부는 총 45만 톤을 매입할 계획이다.

생각지 않게 장내마을 부자주차장에서 땀 흘려 수고하는 우리 농촌의 살아 있는 모습을 보는 것 같다. 이들의 수고가 우리나라의 식량안보를 지키고, 보다 맛있는 쌀을 우리가 매일 먹을 수 있게 해주고 있다는 생각에 가슴이 뿌듯해 온다.

부자주차장에서 200여 m 거리에 꽤 가까이 이병철 생가가 있다.


'부자주차장'인 장내마을 공영주차장이 넓어 공공비축벼 수납 장소로 활용되고 있다.



부자마을의 기를 받을 수 있는 산책로

주차장을 이용하지 않고 장내마을 초입의 정곡파출소 사거리부터 정곡천친수공간 산책로로 400m 거리의 생가까지 천천히 걸어 들어갈 수도 있다. 쉼터와 두꺼비·반지·엽전 등 조형물이 설치돼 걸으며 부자마을의 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성됐다.

걷다 보면 장내마을 중앙에 있는 너른 광장에 이른다. 광장 가운데에 황금나무 조형물이 마을의 상징처럼 서 있다. "힘들어도 웃어라. 절대자도 웃는 사람을 좋아한다."라는 이병철 회장의 명언도 조형물로 설치돼 있다.

광장 주변엔 경남 최초의 전통장류활성화센터와 장내마을회관이 자리하고 있다.


정곡천친수공간 산책로가 부자마을의 기를 받을 수 있도록 조성되었다.
장내마을 중앙 광장에 황금나무와 이병철 회장의 명언이 조형물로 설치돼 있다.
광장 주변에 경남 최초의 전통장류활성화센터(사진 좌)와 장내마을회관(우)이 자리하고 있다.


훈훈한 마을회관 건립 비화

마을회관의 건립 비화가 남다르다. 이병철 회장의 5살 위 친형이 창산 이병각 회장으로 형제는 유년 시절을 장내마을에서 보내며 같은 서당을 다니고 돈독한 형제애를 보였다. 이병각 회장은 무학양조장과 삼강유지를 경영했는데 고향마을에 대한 마음 씀씀이가 남달랐다. 아기를 낳은 집은 어찌 수소문해서라도 쌀과 미역을 꼭 보냈고, 고향 마을의 젊은 청년들을 본인 회사에 취직시켜 도와주었다.

그런데 마을 사람을 챙긴 것은 이병각 회장이 먼저 한 것이 아니다. 어머니 권재림(1885~1959년) 씨는 인정이 많고 세심해서 출산한 집에는 쌀 닷되 미역 한 단을 반드시 보냈고, 친상을 당한 집에는 삼배와 광목을 수십 년 동안 보내왔다. 마을 사람들은 "예부터 이 동네에서 그 집 도움을 안 받은 집이 없을 거라"라고 말한다.

마을회관 건립도 이 같은 정신을 이어받은 손자 이재곤(서울 제일병원 이사장) 씨가 부지를 기부해 이뤄졌다. 장내마을은 '삼성가의 형제'의 기운이 사후에도 계속 전해지고 있는 셈이다.


대문 활짝 열고 모든 사람을 환영하는 생가

광장에서 이정표가 가리키는 골목길로 들어서면 예쁜 벽화들이 그려져 있고 뒤이어 운치 있는 옛 돌담길이 이어진다. 이렇게 150m가량 골목길을 들어가면 이병철 생가가 드디어 모습을 드러낸다.

오늘도 생가의 대문이 활짝 열려 있다. 이렇게 일반에게 생가 개방을 시작한 사람은 이건희 회장이다. 고 이건희 회장은 대구에서 태어났지만 할머니 손에 이끌려 친가인 이 집에서 세 살 때까지 살았다. 이병철 생가는 친형 이병각 회장이 소유하다가 손자 이재곤 이사장에게 상속됐는데, 이건희 회장이 2007년 1월 매입해 같은 달 호암재단에 증여했고, 호암재단은 생가를 보수해 증여받은 지 9개월 만에 일반인에게 전면 개방했다. 고 이건희 회장은 마을 사람들에게 '부자마을'의 명칭을 더하게 하고 오늘날처럼 마을이 활기를 띠게 만든 장본인인 셈이다.

이후 '부자촌 탐방' 테마의 관광명소로 알려지고, 이곳의 예쁜 자연환경과 주변의 자연마을들, 탑바위 등 부자의 전설이 깃든 장소를 같이 둘러보는 부자길 걷기 코스도 개발되었다.

2007년 11월부터 개방을 시작했는데 코로나19 기간엔 2년 2개월 간 휴관했다가 2022년 5월부터 재개방(화~일, 오전 10시~오후 5시)했다.


이정표를 따라 생가로 가는 길. 추억의 벽화와 정겨운 옛 흙돌담 골목길이 방문길을 푸근하게 해준다.
호암 이병철 생가는 월요일을 빼고 상시 개방한다. 소박한 모습으로 마을 한가운데 꼭꼭 숨어 있다.


그 유명하다는 돈바위를 마주하다

대문채를 들어서니 너른 마당 가운데 우물이 있고 사랑채가 정갈하게 맞이한다. 화단을 돌아 안뜰로 들어서니 웅장한 모습의 절벽 바위가 먼저 눈에 들어온다. 그 유명한 돈바위다.

생가는 뒷산인 '호암산' 끝자락이 마치 뒷 담처럼 생가와 붙어 있는데, 산자락의 끝부분인 이 바위가 보호벽처럼 마당에 우뚝 서 있다. 풍수지리로 보면, 곡식을 쌓아놓은 것 같은 노적봉露積峯형상을 하고 있는 호암산의 기氣가 산자락의 끝에 위치한 생가 터에 혈穴이 되어 맺혀 있어 그 지세地勢가 융성한 명당 중에 명당이라고 한다. 그 기혈이 이 돈바위에 뭉쳐 있는 셈이다.

돈바위가 가장 센 부자 기를 받을 수 있는 곳으로 알려지면서 사람들이 앞다퉈 바위를 만지려 하고 심지어 바위를 잘라가거나 바위에 올라가기도 했다. 사고 위험마저 있어 몇 년 전부터는 바위에 가까이 갈 수 없게 앞쪽에 화단을 만들어 보호하고 있다.


대문채를 들어서면 사랑채가 마주보이고 앞 마당에 있는 우물이 집보다는 대문채를 향해 있다.
가장 센 부자 기운을 받을 수 있다는 '돈바위'가 안쪽 마당 한 면을 차지하고 우뚝 서 있다.
생가 안내 리플렛을 본다. 뒤로 돈바위와 안채가 나란히 보인다.


생가 안에 우물이 2개인 이유

돈바위 바로 옆 산자락에 아늑히 쌓인 안채가 산뜻하다. 그런데 아까 들어올 때 사랑채 앞에도 우물이 있었는데 안채 앞 안마당에도 우물이 또 있다. 예전 우물은 마을 전체에 하나 있는 경우가 많았고 내로라하는 집에 하나씩 있는 경우는 있지만 집 안에 우물이 2개나 있는 게 신기하고 이유가 궁금하다.

물이 귀하던 시절 마을 사람들이 멀리 냇가까지 물을 길으러 가는 모습을 보고 사랑채 앞에 따로 우물을 깊게 팠다는 훈훈한 일화가 있다. 사랑채 우물은 늘 동네 이웃이나 외지인이 와서 물을 먹을 수 있도록 조치한 것이다. 그래서 마을 사람들은 물론, 목마른 외지인들도, 들판에서 일하다가 갈증에 지친 일꾼들도 여기서 실컷 물을 들이켤 수 있었다. 우물은 곧 나눔이었다.


가족이 사용한 안채 앞 우물. 또다른 사랑채 앞 우물은 마을 공동 우물로 사용하기 위해 팠다.


부자 되는 첫 번째 원리

마을에 들어오면서부터 느낀 거지만 부자의 이유가 하나둘 나오기 시작한다. 나 혼자 보고 가지려고 하는 게 아니라 남이 흔히 안 할 정도로 특출하게 베풀고 나누는 마음에서 사람들의 마음이 모이는 데에 부자 되는 첫 번째 원리가 숨어있었다. 이것을 보고 자란 이병철 회장은 나누는 법, 내 것을 열어 사람들과 소통하는 법을 자연스레 익혔을 것이다.

실제 이병철 회장은 창업 직전 집에서 거느리고 있던 노비들의 신분을 해방시켜 주었다. 제일모직 건립 시 최신식 설비로 여공 기숙사를 건설한 일은 '노동 착취'가 심하던 당시에 예사롭지 않았다. 국내최고의 문화재단을 건립해 어려운 예술인들을 도운 일도 그의 많은 나눔 중 하나이다.

친형 이병각 회장이 마을사람들을 일일이 챙긴 것도, 아들 이건희 회장이 생가를 개방해 마을 전체에 유익을 준 것도, 친형의 손자 이재곤 이사장이 마을회관 부지를 기증한 것도 같은 맥락이다.

어떤 계산 없이 내가 먼저 주는 것이 진정 나누는 것이고 사람들의 마음을 얻는 요체였다. 그런 사람이 하는 일이란 잘 안될 수가 없다. (호암 이병철 회장 생가를 아직안 둘러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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