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편: 한국 고대사의 보고, 탐방일: 2022.12.11.
700년 동안 잠자던 연꽃이 피어나다
우리 사는 세상엔 가끔 기적이라 불리는 일이 일어난다. 상상만 하던 것이 실제 현실에서 벌어지기도 한다. 불치병에 걸린 사람을 냉동시켜 200년 후 병을 고칠 수 있을 때 깨어나게 하겠다는 '냉동인간 의학'은 아직 실현 가능성이 의문이지만 현재 수백명이 냉동 인간이 되어 있다.
그런데 비슷한 원리로 땅속에서 잠자던 700년 전의 연꽃 씨앗이 현세에서 발아해 꽃을 피웠다. 고려시대에 피었어야 할 꽃이 오늘의 대한민국에서 핀 것이다.
꽃은 그동안 어디서도 보지 못했던 모양과 색깔의 아름다움을 지닌 아라홍련이다. 씨앗이 발견된 함안은 2천 년 전에 아라가야의 중심지여서 아라홍련으로 이름 지어졌다.
함안의 성산산성이 아라홍련 씨앗이 발견된 곳이다. 성산산성에 대한 궁금증이 더 커져간다.
마주한 거대 유적 발굴 현장
함안 무진정의 너른 주차장에 차를 세우고 성산산성으로 출발한다.
주차장에 인접한 '함안 낙화놀이 전수관'과 화장실을 지나 성산산성을 향해 잘 닦인 임도를 따라 오른다. 길 초입에 '아라가야 역사순례길 4구간'이라고 적힌 친절한 안내 이정표가 나오고, 약 500m 정도 오르니 작은 숲을 지나 성산산성이 모습을 드러낸다.
당도한 곳은 동문지 부근이다. 동문 부근 성 안으로 빙 둘러 울타리가 쳐진 거대 저수조 자리가 있고 수많은 파란 천막이 그 위를 덮고 있어 발굴조사 중임을 표시하고 있다.
그런데 그 규모가 엄청 커서 놀랍기도 하고 감히 접근할 수 없는 위엄이 느껴진다. 우리나라에 이런 산성이 있다니, 보는 것만으로 "와~ 대단하다"는 탄성이 저절로 나온다.
한국 고대사 연구의 보고 성산산성
발굴 현장의 규모 만큼이나 성산산성은 우리나라 최고·최대의 목간木簡(나무나 대나무에 글자를 새긴 것) 출토지이다.
지금까지 한반도에서 발견된 고대 목간의 약 30%가 이 성산산성 한 곳에서 발굴됐다. 그동안 총 18차례의 발굴조사(1991~2016년 가야문화재연구소, 2020년 경남연구원)로 300여 점의 목간이 성산산성에서 출토됐다. 가히 ‘목간 보물창고’로 일컬어질 만하다.
한자의 ‘책冊’이라는 글자는 여러 개의 목간을 끈으로 묶어놓은 형상의 글자이다. 종이가 보편화하기 이전인 고대사회의 기록·행정문서가 바로 목간이다. 목간은 당대 사람들이 직접 쓴 서사 자료로 당시 생활상을 반영하고 있는 중요한 기록 유산이다.
기록부족증 겪다 대량 목간 발굴
3600~3000년 전인 중국 최초의 왕조 은殷나라 때(BC 17~BC 11세기) 이미 목간이 사용된 것으로 추정되고, 2000년 전 한나라 무제 때 공자의 옛집에서도 상서尙書·예기禮記·논어論語 등의 목간이 발굴된 바 있다.
중국에선 약 40만 점의 목간이 발견됐고, 일본에서도 30여 만점이 확인됐지만 기록부족증에 시달리고 있는 한반도에서 발견된 목간은 고작 1,000여 점에 불과하다.
그러나 목간 문화를 일본에 전해 준 게 우리 민족이다. 중국의 목간 문화는 기원전 1세기 한반도 남단까지 퍼졌고, 늦어도 7세기에는 일본에도 전파됐다는 것이 지금까지의 연구 결과이다.
그럼에도 한반도에서 성행했던 목간 기록 문화는 썩어 없어지거나 좁은 땅에 켜켜이 쌓여온 숱한 역사의 부침과 현대사회의 개발로 찾을 수 없어 고대사 연구의 많은 부분이 가리어져 있다. 이 같은 안타까운 현실에서 성산산성에서 무더기 목간이 나온 것은 '위대한 발견'이 아닐 수 없다.
신라의 체계적 지방운용 행정을 확인하다
2003년 성산산성 출토 목간에서 확인된 제첨축題籤軸(파리채 모양의 두루마리 종이문서에 꽂아 사용한 문서분류용 인덱스)은 우리나라 목간사에 큰 의미를 지닌다. 일본에서는 인덱스 용 목간이 8세기대 헤이조큐 유적에서 출토된 바 있다. 따라서 6세기대에 제작된 성산산성 제첨축은 일본의 것보다 최소 150년 앞선 것이다.
신라 중앙정부는 6세기부터 지방의 행정체계를 장악하고 세금을 할당했다. 신라중앙정부가 관리한 촌적村籍이자 국가가 부과할 세금의 양을 표시해놓은 재정운용 문서인 신라촌락문서(695년 제작설 유력, 일본 쇼소인正倉院 소장)는 촌村별로 촌역, 가구와 인구, 우마, 전답, 수목 등을 3년마다 조사하여 그 증감을 기록했음을 증거하고 있다.
이 전제 하에 보면 성산산성 출토 제첨축은 함안의 예하 지방관청의 세금 징수에 관한 문서로, 신라가 520년에 반포한 율령이 함안 지방에서 실행된 증거이자 지방행정에서도 고급 종이를 사용하고 그 인덱스 용으로 제첨축을 사용했음을 보여준다.
윤선태 동국대 교수는 “목간자료에는 밭 몇 전, 논 몇 전 등을 할당하는 내용이 나온다”면서 “신라 중앙정부가 6세기부터 지방의 행정체계를 장악하고 사용처에 따라 할당하는 지배방식을 완성했음을 알려주는 획기적인 자료”라고 평가했다.
또한 목간을 통해 밝혀진 지명, 인명, 관등명 등은 6세기 신라의 촌락구조와 지방행정체제, 법률제도 등에 대한 의문을 풀 실마리를 제공해 주고 있다.
주보돈 경북대 명예교수는 “성산산성 목간은 신라의 촌락 지배 강화와 함께 기존 외위外位(지방민에게 주어진 관등) 체계와 성립 과정, 이에 내재한 의미를 풀 실마리를 제공한다”며 “신라가 새롭게 편입한 지역과 주민을 어떻게 체계적으로 관리하고 운용했는지 보여주는 자료”라고 평가했다.
지역별로 구간 나눠 맡아 쌓아올려
이외 물품에 꼬리표를 단 다량의 하찰 목간荷札木簡과 노역징발에 관한 문서 목간, 장례 방법에 대한 목간 등 기록이 부족한 고대사 연구의 귀중한 자료가 대거 발견됐다.
하찰 목간은 '어디에 사는 누가 무엇을 얼마나 보낸다' 등의 내용을 기록한 것이다. 이 용도에 대해선 세금으로 보내는 물건에 매달았던 목간이라는 주장과 세금이 아니라 산성 축조 등에 동원된 노동자들의 먹을거리에 붙인 양미養米 목간이라는 주장이 있다.
노역징발 목간은 성산산성의 축조 시기와 역역 동원체제, 축조방식을 정확하게 연구할 수 있는 귀중한 자료이다. 성벽을 쌓을 때 여러 지역의 인력을 동원해 구간 별로 할당했음을 보여준다. 실제 성산산성의 성벽을 보면 구간별로 축조 기법상의 차이가 부분적으로 나타나는데 여러 지역이 구간별로 맡아서 쌓았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한양도성은 성벽 축조를 구간별로 나눠 전국 지역에 할당해 쌓았고 잘못 축조됐을 때 책임을 묻는 축조실명제를 적용한 대표 성곽이다. 성산산성의 노역 징발 목간은 이미 삼국시대부터 성벽 축조의 구간 할당제가 시행됐음을 보여준다.
또 목간에서 확인된 시신을 벽돌로 덮었다는 것에서 당시 장례는 눈에 띄지 않게 시신을 감추는 것이며 돌로 매장하는 방법이었다는 것도 확인할 수 있다.
우리나라 최초의 이두 문장 발견
그런데 놀랍게도 목간에서 우리나라 최초의 이두 문장이 확인됐다. 이승재 서울대 인문대학 언어학과 교수는 성산산성 출토 목간 중 가장 많은 글자인 68자가 적힌 221호 목간 전체를 해독했다.
해독 내용은 6월에 정확한 명칭을 알 수 없는 마을의 촌주가 군대 제의를 마친 후 성인남자 65명 정도가 600개의 벽돌이 할당된 산성을 쌓으러 가고자 했으나 갑작스러운 고위직 인사의 죽음으로 가지 못하는 것을 아뢰는 것이다. 이를 통해 신라시대에 이미 문서행정을 시행했음을 알 수 있고 산성처럼 중요한 시설을 구축할 때는 마을마다 할당을 했는데 인력은 성인남자 65명 정도이며 이들이 600개의 돌을 쌓아야 했다는 것이 밝혀졌다. 이 내용을 이두문자로 쓴 것이다.
이 교수는 이미 6세기 중엽에 '한국한자'가 사용되고 있는 점 등 기존의 고대 한국어사를 다시 기술해야 할 정도로 획기적인 내용이 담긴 목간이란 사실을 강조했다.
우리말이 1500년 시간의 가교돼
이 같은 이두 표기로 볼 때 '바리바리 짐 싼다'는 말이 1500년된 표현이라는 사실도 확인됐다.
성산산성 목간에서 차발此發, 패발稗發과 차부此負라는 단어가 자주 등장한다. 여기서 ‘발發’은 ‘짐’을 뜻하는 ‘부負’와 비슷한 뜻을 지닌 관계로서, ‘바리’와 발음이 근사한 신라식 이두 표기이다. 즉 지금 우리가 쓰는 ‘바리’는 ‘발發’의 후대발달형일 가능성이 크다.
우리말이 1500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고대와 현대를 연결하는 소통의 근원이 되고 있다는 사실에 감동이 끓어오른다.
성산산성에선 목간 외에 나무방망이, 빗 등의 많은 목제품, 과일의 씨, 신라 시대 유물인 신라 기와, 깨진 토기 조각 등 많은 유물이 출토됐다. 산성에 올라와서 본 저수조와 성 안 건물터 네 곳도 확인되었다.
성산산성 자체가 우리의 고대사와 삼국시대를 밝히는 중요한 자료라는 생각에 이곳에 서 있다는 것이 마구 마음이 설렌다.
그런데 700년 전의 연꽃 씨앗은 어떻게 이곳에서 발견되어 현세에서 꽃을 피운 것일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