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랜만에 영화를 보고 눈물이 핑 돌았다. 영화 제목은 Wild이다. 한 여성이 혼자 PCT 4,300km를 걷는 영화다. 걷기를 통한 경험이 비교적 많다고 할 수 있는 나로서는 보기 전부터 호기심이 돋았다. Wild를 처음 접한 것은 2016년 실리콘벨리에 3개월 연수를 갔을 때다. 그때 같이 연수하던 한 CEO가 Wild를 보내줬는데 연수 스트레스가 많다 보니 영화 보는 한가로움을 즐기지 못했다. 그러고 벌써 8년가량이 흘렀다니 믿기지 않는다. 이번엔 국토종주를 가다 혁이가 wild를 봤다며 넷플릭스 1위란다. 이번엔 기어코 보리라 생각하고 작정하고 보았다.
주인공 셰릴 스트레이드가 걷는 PCT는 미국 3대 장거리 트레일 중 하나로 멕시코 접경 캠포에서 캐나다 접경 매닝파크까지 서부의 캘리포니아, 오리건, 워싱턴 3개 주를 관통하며 사막, 호수, 협곡 등 자연환경을 만나는 꿈의 트레일이다. 우리나라엔 없는 부러운 도보 국토종주 길이다. 물론 내가 이끈 국토종주단이 만든 사람길국토종주 루트(나는 이 길을 앞으로 HANT:Human path Across the Nation Trail로 부르기로 했다.)가 있지만 공식화되지는 않았으니 아직 없다고 해야 할 것이다. 셰릴 스트레이드의 완주 경험을 담은 책 <와일드>와 2014년 개봉한 동명의 영화로 인해 전 세계 하이커들이 PCT를 찾는 계기가 됐다.
모든 사람이 여자 혼자 야생의 길 4,300km를 완주했다고 하면 '용감하다'고 말할 것이다. 그러나 영화를 보고 나면 '용감'이란 단어를 함부로 쓴 것을 자책하게 될 것이다. 셰릴은 자살을 선택하는 것보다 더한 인생의 막다른 골목에서 다른 어떤 선택지도 없어 걷기에 나섰기 때문이다. 거기에 '용감'은 배부른 단어이다. 다른 사람보다 더하기 위한 선택으로서가 아니라 자신의 상황을 견디거나 극복할 다른 방법이 없어 완주를 자신할 수도 없고 대책도 없는 걷기에 무작정 나선 것이 그녀가 PCT를 한 동기이다.
무얼 가져가야 하는지도, 짐을 줄이는 방법도 몰라 배낭은 대책 없이 무겁고 유일한 신발은 내동댕이쳐지고 먹을 게 없어 굶기도 하면서도 그녀의 뇌리를 감싸고도는 것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 후회, 삶에 대한 회한, 자책으로 가득 찼다. 어떻게 해야 자신을 패망으로 몰고 간 그 무수한 감정들에서 자유로워질 수 있을까.
걷기는, 그리고 자연은, 그 해답을 말없는 말로 제시한다. 일류가 되기를 바라고, 남보다 낫기를 바라고, 경쟁에서 이기기를 바랐지만 그런 자신의 생각과 태도가 엄마와 가족을 힘들게 하고 몰이해하는 이유가 됐었다. 그런 강박은 어머니가 갑자기 죽게 되면서 삶의 포기라는 반대의 길을 택하게 만들고 스스로를 몹쓸 인간으로 내던진다.
무한 경쟁만 있는 사회에서 최고를 지향하며 바쁘게 사는 모두가 손을 놓는 어느 한순간 셰릴과 같은 처지에 놓일 수 있다. 우리 모두 어느 순간 번아웃이 될 가능성을 안고 현재를 인정하거나 제대로 즐기지 못하고 강박과 의무, 불안 속에서 살고 있다. 그러나 불행은 모두 자신의 현재를 인정하기를 거부하는데서 온다.
주인공은 언제나 최고를 지향했지만 과연 최고란 무엇일까?
걸으며 비로소 셰릴은 마음의 평정을 찾고 어머니의 삶을 떠올린다. 식당종업원에 평생 대출을 갚아야 하고, 무너지기 직전의 집에 살면서 손찌검하는 주정뱅이와 결혼했으며 일평생 ‘엄마와 매 맞는 아내’ 역할만 하다가 세상을 떠난 엄마, 그런 최악의 상황 속에서도 ‘엘 콘도르 파사’(철새는 날아가고)를 끊임없이 부르며 ‘딸이 태어났기에 지난 인생을 후회하지 않는다’는 절대 긍정의 어머니를 진정 이해하게 된다. "딸아! 언제든 마음만 먹으면 아름다운 길로 들어설 수 있단다. 너의 최고의 모습을 찾아내고 그것을 지켜내라"는 어머니의 가르침을 온전히 받아들이게 된다.
세상에 그 누구도 최악은 없다는 교훈, 최고란 자신이 마음먹기에 달려 있으며, 아름다움을 볼 수 있는 눈도 결국 마음에 있다는 깨달음이었다. “내 인생은 마약에 찌들고 길거리 여자처럼 몹쓸 사람이 아니라, 다른 이들처럼 신비롭고 돌이킬 수 없는 고귀한 존재입니다.” 이 고백은 그냥 관념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다. 처절하게 울고 불고 악쓰면서도 삶을 포기하는 대신 길을 찾았던 한 여인이 스스로 찾은 깨달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