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초급/골목길
난 서촌을 보면 정겨우면서도 아스라하다. 여러 삶이 혼재되고 없어진 기억 저 편의 기억을 끄집어 내 주기도 하고, 서촌이 인기를 얻으면서 언젠가 기억을 잃어버릴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 내재하기 때문이다. 그만큼 서촌의 존재는 소중하다. 우리는 우리의 도시를 사랑하는 법을 배우지 못했고, 많은 것이 사라져 갔음에도 서촌은 지금도 여전히 우리의 깊은 향수를 자아낸다. 우리네 삶이 묻어있는 곳, 그래서 그윽하기가 북촌보다 더한 서촌으로의 여행을 떠나본다.
서울은 600년 역사의 사람 사는 정취가 대대로 서려있는 고도이다. 그 삶의 향기를 찾을 수 있는 곳이 서울의 옛 골목길 서촌이다. 우리나라 최초의 사진 갤러리로 프랑스 피카소 미술관을 개조한 유명 건축가 코르뉴의 작품인 대림미술관, 한국 현대문학의 본격적인 등장을 알린 '시인부락'의 탄생지 보안여관, 효자동 이발사, 태극기 휘날리며 등 영화의 모델이 됐던 옛 이발소, 지금은 북카페로 사용되지만 옛 모습의 향기가 보존된 대오서점, 옛날 빵집의 대명사로 여전히 영업 중인 효자동 빵집(효자 베이커리), 주인장들의 센스가 느껴지는 개성 강한 상점들, 북촌에 비해 서민적인 한옥들, 엽전을 바꿔서 먹는 도시락 카페와 미국 존 케리 국무장관이 가서 맛봤다는 기름떡볶이로 유명한 통인시장, 조선 최고의 임금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 짧은 생애의 수많은 밤을 젊은 고뇌로 지샛을 윤동주 시인의 하숙집터, 천재 작가 이상의 집 등 서촌은 '걸으면 비로소 보이는' 우리의 삶을 대변해주는 볼거리가 셀 수 없이 가득하다.
서촌 여행길 정보
◇길의 유형/형태 : 골목길/포장길
◇거리 : 8km
◇소요 시간: 3시간
◇시작/종료 지점 : 경복궁역 4번 출구/경복궁역
◇경유지 : 대림미술관-통의동 백송터-보안여관-서촌 한옥마을-쌍홍문터-해공 신익희 가옥-청와대 사랑채-무궁화동산-농아학교-우당기념관-옛 이발소-상촌재-(이완용 집터)-통인시장-효자 베이커리-윤덕영 집(벽수산장)터-윤 씨 가옥-수성동 계곡-윤동주 하숙집터-박노수 미술관-대오서점-세종대왕 나신 곳 표지석-이상의 집-청전 이상범 가옥-체부동 홍종문 가옥-필운동 홍건익 가옥-배화학당 선교사 숙소-필운대-매동초등학교-종로도서관-황학정-사직단
◇걷기 포인트 :
- 경유지 32곳과 특색 있는 가게, 카페, 옛 거리
- 한국의 전통 보자기를 디자인의 모티브로 삼고 건축한 한국 최초의 사진 전문 미술관 대림미술관
- 현재는 후계목이 주변에 식재되어 있는, 고사되기 전 천연기념물이었던 '통의동 백송터'
- 서정주가 김동리, 오장환, 김달진 등 동년배의 시인들과 문학 동인지 ‘시인부락’을 만들고 활동했던 공간인 보안여관
- 이곳이 효자동이 된 이유인, 임진왜란 때 어머니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잃은 두 아들의 효성을 기린 쌍홍문 터
- 2017년 6월에 개관한 전통한옥 문화공간 '상촌재'
- 독립운동가이자 해방 후 제헌의원으로 국회의장이자 대통령 후보였던 신익희의 소박하기 그지없는 30년대 해공 신익희 가옥
- 서울농학교 학생의 절실한 소망을 담은 담장벽화
- 친일파 이완용의 집 중 아직 바깥채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는 이완용 집터
- 엽전을 구매해 엽전으로 음식을 구입할 수 있는 통인시장과 기름에 떡을 볶은 기름떡볶이
- 2011년 집과 함께 미술작품과 수석 등을 종로구에 기증한 박노수 화백의 '박노수 미술관'
- 친일파 윤덕영이 일본으로부터 받은 은사금으로 옥인동 면적의 절반 이상을 사들이고 지은 '벽수산장 터'
- 친일파 윤덕영이 소실을 위해 건축한 한옥 윤씨가옥(이 가옥은 남산 한옥마을에 복사 재현돼 있음)
- 경치가 뛰어나 많은 시인묵객들이 사랑하던 '수성동 계곡'(그 밑 옥류동천에 송석원이 있었다.)
- 윤동주 시인이 연희전문학교를 다니던 시절 약 다섯 달간 하숙했던 소설가 김송의 집 '윤동주 하숙집터'
- 태종이 왕이 되기 전 아들 세종을 낳은 곳 표지석
- 동양화가 이상범이 살았던 집과 화실이 있는 청전 이상범 가옥
- 넓은 대지에 연못과 정원을 갖춘 일제 때의 전통 한옥 체부동 홍종문 가옥
- 1930년대 근대 한옥과 전통양식이 혼재되고 지형을 잘 이용한 필운동 홍건익 가옥
- 백사 이항복의 집 터 필운대와 선교사 숙소(배제여고 교정 안에 있어 코로나 여파로 출입 차단될 수 있음)
- 우리나라 최초 공립 도서관인 종로도서관과 최초 공립 보통학교인 매동초등학교
-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 때 팔아서 옮겨지게 된 국궁장 황학정
- 종묘사직의 조선을 대표하는 사직단
- 이 외 위 본문에서 소개한 경유지들
◇녹색길 비율 : 20%
◇난이도/경사도 : 하초급/20도 미만
◇샷 장소 : 중
◇걷기 좋은 때 : 1년 내(골목길은 특별한 때가 없음)
◇Tip :
- 서촌의 명소들도 많지만, 효자 베이커리의 빵맛, 통인시장의 기름떡볶이, 서촌의 어느 카페라도 꼭 들러서 서촌을 음미해 보자.
- 북촌과 달리 서촌의 골목은 친절하지 않다. 이정표가 없어 골목 사이에서 길을 잃을 수 있고, 말한 그 장소가 어딘지 알기도 힘들다. 그럼에도 낯익은 모습의 골목에 서면 모든 것이 용서된다. 아래에 만든 지도를 잘 따라가면 서촌을 가장 많이 볼 수 있다.
- 서울관광재단에서 운영하는 해설 프로그램을 신청하면 해설사와 함께 위 코스 중 중심부를 탐방할 수 있음
◇등급 : ★★★★★
참고 지식
◇서촌 : 경복궁 서쪽에 있다 해서 서촌으로 불린다. 인왕산과 경복궁 사이, 통인동, 체부동, 효자동, 청운동, 신교동, 옥인동, 필운동, 누상하동, 사직동 일대이다. 이곳에 사는 주민들은 세종대왕이 태어나신 곳이라 하여 '세종마을'로 불리길 원한다. 그만큼 서촌은 서울 600년의 역사를 상징하는 지역이다. 조선 시대에는 왕족과 사대부, 중인들의 거주지로 유명하였고, 옥계시사(송석원시사)가 열리고, 겸재의 주 활동무대로 인왕제색도, 추사의 명필이 탄생한 예술혼이 이어졌다. 일제 강점기 이후에도 문인과 예술인이 많이 자리 잡았고, 지금도 서민의 삶을 대변하며 오랜 예술혼이 번뜩이는 곳이다. 우리에게 서촌이 없다면 고향을 잃어버린 느낌이 들 것이다. 그만큼 지금도 서촌은 우리 깊이 뿌리 박힌 정서를 대변하고 있다.
◇벽수산장 : 친일파 윤덕영은 나라를 팔아 은사금으로 받은 돈으로 옥인동 땅을 사들이기 시작해 나중엔 옥인동의 절반이 넘는(53.54%) 땅을 매입해 거의 2만 평을 소유하였다. 윤덕영은 이 땅에 프랑스 귀족 별장의 설계도를 바탕으로, 1913년에 저택 건설에 착수해 35년 완공했는데, '조선에서 가장 사치스러운 집'으로 불렸다. 연건평 900평에 독일에서 들여온 최고급 건축 자재로 지었으며 대리석과 황금, 옥으로 치장했다. 1만 7천 평의 부지엔 운동장과 배를 타고 노는 큰 연못이 있었고, 차가 저택 현관까지 들어가게 돼 있고 현관에는 모자 벗는 방이 따로 있었다. 서화실, 서예실, 당구장, 사우나실 등도 있고, 응접실 천장엔 유리로 수족관을 설치하고 금붕어를 길렀을 정도로 상상을 불허하는 초호화판이었다. 1700년대 위항문학의 중심지로서 송석원시사를 이끈 천수경이 인왕산 아래 옥인동 계곡 주변에 지은 송석원 일대를 매입하여 그 위에 지었으므로 처음엔 송석원으로 자칭하였다가 나중에 벽수산장으로 이름했다. 일양정, 소실댁인 윤씨가옥, 현재의 박노수 가옥 등 부속건물만 15채가 있었고 당시에도 자동차가 10여 대가 있었다. 37년에 준공하였으나 윤덕영이 40년에 사망하므로 윤덕영이 실제로는 거의 사용하지 못했다. 한국 전쟁 전후에 한국통일부흥위원단 청사로 쓰이다가 1966년에 직원 실수로 불타 1973년에 모두 철거되었다. 현재 벽수산장 정문 기둥 4개 중 3개가 옥인동 주택가에 밑부분이 길에 묻힌 채 남아 있다. 철거될 때 건축자재들도 주민들이 가져가 일부 주변 집에 남아 있다.
경유지 소개
◇우당기념관 : 서촌엔 나라를 팔아 초호화판 집을 지은 윤덕영(일제의 은사금을 받기 전까진 남의 집에 살만큼 가난했다.)의 자취가 있는 반면에, 그보다 더 많은 재산을 모두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세우고 독립운동에 헌신하다 자신은 일제의 고문에 죽고 가족은 굶어 죽어야 했던 이회영 선생의 정신이 서려 있다. 이 두 인물의 대비는 서촌이 우리 시대에 던지는 물음으로서 역사적, 정신적, 교육적 가치를 함축한다. 이회영 선생을 기리는 우당기념관은 겸재길 중간에 국립 농아학교 앞에 자리 잡고 있다. 그의 조상으로 영의정을 지낸 이항복의 집터가 서촌에 있어, 서촌과 이회영은 뿌리 깊은 인연을 갖고 있다. 이회영 선생은 국내외 항일 운동의 전반에 참여하며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본보기가 된 독립운동가이다. 당시 이회영과 형제들은 명동 일대의 거의 대부분의 땅을 소유하고 있었다. 지금으로 치면 2조 원대의 땅을 600억 원(당시 40만원)에 헐값에 팔아 6형제와 가족, 식솔 40여 명이 모두 만주로 가 독립운동에 투신했다. 이회영 선생은 일제가 귀족 작위와 은사금으로 회유했으나 이를 거부하였고, 헤이그 밀사 파견 등 고종을 도와 국가의 독립을 도모하다 최종에는 전 재산을 팔아 신흥무관학교를 통한 무력항쟁에 나서게 되었다.
◇이완용 집터 : 역적 3관왕인 친일파 이완용의 집터도 서촌에 있다. 그러나 이 사실을 아무도 모른다. 관광 안내책자나 지도, 서점의 서촌 관련 서적 어디에도 서촌에 이완용의 집이 있다는 사실을 말하지 않는다. 그렇지만 아직 이완용의 집 중 가장 중요한 바깥채가 당시 모습 그대로 남아 있다. 이완용은 일제에게서 받은 은사금으로 옥인동에 약 4천여 평의 땅을 사고 안채와 바깥채 등 초호화판의 서양식 건물을 지었다. 이완용은 1913년 12월부터 1926년 2월 죽을 때까지 이 집에서 살았다. 이 집과 터는 이완용 사후 자손들에게 상속되었다가 해방 후 미군정 때 적산으로 징발되었고 세월이 흐르면서 여러 필지로 분할돼 현재 교회, 은행, 주택가 등이 자리하고 있다. 현재 남은 이완용 집(바깥채)은 민간인이 소유하고 있어, 앞으로의 운명을 알 수 없다. 자랑스럽지 않은 역사도 유산이 될 수 있다. 독일이 자신의 수치인 '아우슈비츠 수용소'를 역사 유적으로 보전하는 것은 다시는 그런 일이 되풀이되지 않도록 귀감으로 삼기 위해서다. 아직 없는 친일파 박물관이 이완용의 집 유물에 건립될 수 있도록 정부나 문화재청의 결단이 있어야 할 것이다.
◇보안여관 : 보안여관은 그냥 여관이 아니다. 문기(文氣)와 예기(藝氣)가 왕성한 서촌의 일면을 고스란히 간직한 서촌의 상징적 건물이다. 보안여관 건립 시기는 정확히 알 수 없지만 미당 서정주가 <천지유정>에서 “1936년 가을, 함형수와 통의동 보안여관에 기거하면서…”라고 써놓은 기록을 통해 1930년대에 문을 연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 2004년까지 여관으로 80여 년 간 손님을 맞이했다. 서정주는 이곳에서 지내며 김동리·김달진·오장환 등 동료 시인과 함께 문예동인지 <시인부락>을 펴내므로 한국 현대문학의 문을 열었다. 화가 이중섭 역시 이곳에서 머물며 일본에 간 가족을 눈물로 그리워했고, 시인 이상도 보안여관을 자주 이용했고, 윤동주 시인 역시 보안여관에 자주 투숙했다. 1960~70년대에는 신춘문예를 준비하던 지방 소설가나 시인들이 장기 투숙하며 드나들었다. 현대문화예술의 거대 물줄기로서 예술혼을 불태웠던 곳이 보안여관이다. 2004년 운영난으로 문을 닫고 철거 위기에 몰렸으나 2007년 일맥문화재단이 사들여 복합문화공간으로 재탄생시켰다. 취약한 골격을 보강했을 뿐 옛 정취와 혼이 지금도 그대로 전달되고 있다.
서촌 여행길 지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