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날도 내 역할을 다 하지 못했다. 상사들에게 온갖 질타와 무시를 받았다. 익숙하다. 종종 있는 일인걸. 누굴 욕할 필요도 없지. 회사는 못나면 그런 취급을 받아도 되는 곳이다. 자리에 돌아오니 책상 위에 명함이 보인다. 선명하게 찍힌 대리라는 직책이 눈에 들어온다. 잠시 관료제에서 대리의 위치와 그 위치가 의미하는 바가 무엇일지 되새겨 보았다. 코웃음을 쳤다. 고작 이 정도 하면서 대리는 무슨. 나는 그저 1년 차만도 못한 4년 차 대리였다.
갑갑한 마음에 사내 카페로 내려갔다. 차가운 아메리카노를 주문했다. 이미 석 잔이 넘는 커피를 마신 뒤였지만 개의치 않았다. 회사에서 술을 마실 수는 없지않은가. 아쉬운 대로 카페인에라도 취할 요량이었다. 커피를 받아 들자마자 옥상으로 올라왔다. 일회용 플라스틱 뚜껑을 열어 입을 대고 벌컥벌컥 마셔버렸다. 방금 산 커피의 반 이상이 사라졌다. 텁텁한 쓴맛이 목구멍 깊숙한 곳을 찌른다.
때마침 친구에게 전화가 왔다. 간단한 근황 얘기가 오고 갔다. 이직한 곳은 어떠냐고 친구가 물었다. 나는 전 직장의 단점과 비교해, 이직한 곳의 장점에 대해 나열했다. 친구가 안심했다. 걱정이 많았는데 다행이네. 그러엄! 이제 앞으로 나갈 일만 남았는걸. 최대한 활기차게 대답했다.
전화를 끊자마자 명치에 신호가 온다. 네 번째 커피는 객기였다며 위장에서 고함을 지르는 모양이다. 옥상 벤치에 주저앉았다. 통증이 심해 움직일 수조차 없었다. 속은 작정한 듯 뒤틀리기 시작했다. 명치를 손가락으로 누른 채로 웅크리고 버티는 수밖에 없었다. 몇 분이나 지났을까. 통증이 점점 잦아들었다.
가을이 시작되려는 늦여름의 옥상은 차가웠다. 식은땀으로 범벅이 된 목덜미를 차가운 바람이 감싸 쥔다. 땀이 빠르게 식으면서 온몸에 한기가 들었다. 아직 약한 경련이 느껴졌다. 방금의 끔찍한 통증이 떠올라 급히 핸드폰에서 위경련 완화에 좋다는 스트레칭을 검색해 두어 번 따라 했다.
달밤에 회사 옥상에서 위경련 스트레칭이라니. 내가 왜 이 시간에 집도 못 가고 여기서 이래야 하나. 어차피 그만둘 건데, 지금 갈까? 아니지. 어른은 그러면 안 되지. 헛웃음이 난다. 난 왜 이런 일조차 결단내리지 못하는 이도저도 아닌 인간일까.
눈물을 깔끔하게 닦아내고, 얼굴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정신이 좀 난다. 계단을 따라 다시 내 자리로 돌아갔다. 자리에 앉으니 칸 너머로 몇 가지 지시사항이 떨어진다. 다행히 방금 운 사람처럼 보이지는 않았나 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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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 책 <가끔은 조용하고 어둡고 싶은거야>에 수록된 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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