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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Nov 25. 2018

처음 만나는 새벽의 감촉

그런데 오늘 새벽은 조금 낯설다. 두려움을 뒤적이는 것은 이전과 같은데.

새벽을 거니는 것은 익숙한 일이다. 누군가에게는 달리는 것이 익숙하고 누군가에겐 비행기를 타는 것이 익숙한 것처럼 나에게는 새벽과 홀로 마주하는 것이 익숙한 일이다. 새벽과의 긴 인연의 시작점은 아마 스무 살 무렵부터 였을 것이다. 스무 살이 되던 해, 그러니까 대학생 명찰을 달고나서부터는 나의 취침시간에 부모님이 간섭하지 않게 되었다. 특히 먼 지방대의 기숙사에서 생활하는 아들의 취침시간을 간섭하는 것은 더욱 어려운 일이었을 것이다. 나는 살면서 처음 얻은 완전한 자유를 촘촘하게 즐기려고 노력했다. 당시 우리 기숙사의 밤은 낮보다 뜨거웠다. 나를 포함한 많은 학생들은 기숙사의 작은 방들을 서로 옮겨 다니며 조금씩 주머니를 털어 치킨 한두 마리를 시켜놓고 밤새 많은 이야기를 주고받았다. 그곳에서 나누어진 이야기를 모두 책으로 쓴다면 일주일만 받아 적어도 족히 두꺼운 책 열댓 권 분량은 뽑아냈을 것이다. 거의 매일, 제각각의 공간에서 서로 편한 사람들끼리 모여 앉아 현재를 말하며 함께 새벽을 맞는 그 순간들이 나는 가끔 그립다.


그 저렴한 토론의 장이 나이가 들면서, 학교 울타리 밖으로 나오면서 비싸졌다. 어느 공간에서든 좋은 사람들끼리 모여 이야기를 나누면 안주 값이니, 술 값이니 하는 것들이 따라왔고, 이전처럼 '매일' 그런 대화를 나누기에는 이제 다들 두려운 것이 많아졌다. 적지 않은 월급이 순식간에 사라지는 것도, 과음과 늦은 취침으로 정해진 출근시간을 지키지 못해 허겁지겁 달리는 것도, 또 내가 하고 싶은 것도 뭔지 모르겠는데 술이나 처먹고 내뱉은 푸념들의 무의미함도 다 두려웠을 것이다. 점차 함께하는 자리가 드물어졌다. 일주일에 한두 번이 한 달에 한두 번이 되고, 한 달 내내 그런 자리가 없는 경우도 많아졌다. 그렇게 새벽은 외로운 시간이 되었다. 두려운 것들을 가득 안고 혼자 까만 하늘을 올려다봐야 하는 이상한 시간으로 바뀌었다.

혼자 보내는 새벽이 익숙하다는 것은 정해진 절차에 적응했다는 뜻이었다. 컴퓨터 게임과 같은 무의미한 행동을 하며 이런저런 두려움을 끊임없이 만지작거리다가 문득 졸음이 오는 순간 침구로 몸을 던지는 그런. 아무 의미 없는 새벽들 사이에 간혹 기억에 남는 특별한 경우가 있었다면, 아침이 올 때까지 버티다 몇십 분 눈 붙이고 회사로 끌려가는 '지옥문' 케이스, 혹은 의자에서 눈을 붙인 것 같은데 찬 바닥에서 눈을 뜨게 되는 '순간이동 능력이 생긴 것 같다' 케이스. 두 가지였다. 첫 번째 '지옥문'케이스의 결말은 하루 종일 일찍 자야겠다고 가슴 치며 후회하고, 다짐하다가 또 새벽까지 잠을 안 자는 식이었고, (인간의 생체리듬이란 이토록 잔인한 것이다. 어제 잠이 모잘랐다고 해서 원래 보통 깨어있어야 할 시간에 잠을 재우진 않는다.) 두 번째 '순간이동 능력이..'케이스의 결말은 찬 바닥에서 느껴지는 냉기에 눈을 뜨면 마치 방금 (적어도) 시속 50km 이상의 차에 치여 잠시 기절한 것처럼 온몸이 굳어 움직이지 않는 마비를 경험하는 식이었다. 


처음에 말했던 평범한 새벽들과 비교하면 그렇다는 것이지 이런 케이스 또한 꽤 자주 있는 일이었으므로 특별하다고는 하기 어려웠다. 단 두 가지로 분류된 것만 봐도 그렇지 않은가. 그런데 오늘 새벽은 조금 다르다. 한 손으로 끊임없이 두려움을 조몰락거리는 것은 이전과 같은데, 자꾸 다른 한 손으로는 더듬더듬 책을 읽고 글을 써 내려가는 것이다. 삶에서 처음 느끼는 감촉이다. 어릴 적 처음 보는 장난감을 만질 때의 그것과 같다. 만지는 모든 감촉을 기억하게 되던 마법 같은 순간. 스탠드 아래에서 책을 따라가는 눈동자의 움직임, 키보드에 닿는 손가락 끝, 모니터를 바라보는 무심한 듯 슬픈 표정과 까만 밤하늘 위로 잠시나마 하얀색 분필로 예쁜 미래를 그리는 기억까지. 어쩜 이 뻔한 새벽이 하나같이 흥미롭게 느껴질 수 있는지. 이 새벽은 길게 기억해야 할 것 같다. 나는 머릿속에 '새벽_특이사례_#01'이라는 이름의 파일을 하나 만들어 기억을 저장한다. 이름 아래 메모는 이렇게 쓴다. '지금껏 멍청히 서 있던 것이 질렸는지 자꾸 무엇이든 하고 있던 모습의 감촉' 아마 내가 다시 무의미한 새벽을 보내게 되었을 때 꺼내보면, 잠시 미소지을 정도 위로는 되어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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