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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신익준 Dec 19. 2018

생일상

 생일이 되면, 하루 종일 손바닥만 한 화면 위로 생일 축하 인사들이 들어온다. 그때마다 잠금화면은 밝아졌다 어두워지길 반복한다. 마치 흔들리는 촛불처럼. 나는 손이 닿을만한 거리에서 엎드린 자세로 멍하니 그 현상을 관찰한다. 왁자지껄하던 생일의 소리는 이제 기계 추가 흔들리는 소리로 바뀌었다. 웅. 웅. 웅. 응. 웅. 웅. 나는 하루 종일 말없이 쳐다만 보았는데, 너는 대체 무엇에 대꾸를 하는 거니.


 예전부터 생일에 대한 특별한 로망은 없었다. 생일이 되면 매번 케이크가 상에 오르긴 했다. 매번 같은 모습의 케이크. 생크림 케이크를 좋아하지 않는데도 매번 생크림 케이크를 먹어야 했다. 그전에 꼭 거쳐야 할 것은 유구한 역사를 자랑하는 짧은 행사였다. 비싼 콘서트의 오프닝처럼 꾸미려고 하지만, 사실은 이미 열 번은 넘게 반복되고 있는 우리 만의 서프라이즈. 방문 안에서 촛불이 켜지고, 발 뒤꿈치를 한껏 세운 채 입을 벌리고 케이크를 든 엄마의 얼굴. 그때는 시시하게 산다는 것이 무엇인지도 모르고 그런 것을 시시하다고 생각했다. 재미없는 행사가 끝나고, 촛불이 꺼지고 난 뒤엔 잔뜩 선물을 기대했지만, 게임기나 운동화, mp3 같은 선물을 받은 기억은 없었다. 친구들의 발에는 대부분 나이키, 아디다스와 같은 브랜드의 신발이 신겨있다가 주기적으로 또 다른 새 신발로 바뀌어 신겨있었다. 그들의 신발이 두세 번 바뀌는 동안 나의 발에는 낡은 시장표 운동화가 신겨있었다. 그때는 그 차이를 알지 못했다.


 불행인지 다행인지, 그 차이를 조금이나마 이해할 수 있는 계기가 있었다. 고등학교 2학년 중반이 지났을 때. 나는 친구의 생일잔치를 가게 되었다. 친구의 안내를 따라 그의 집 문을 열었는데, 작지 않은 면적의 거실 가운데로 길고 큰 나무 테이블이 자리 잡고 있었다. 제사 때처럼 얇은 전지가 깔린 테이블 위로는 피자와 치킨, 케이크와 중국음식 등이 빼곡히 차려져 있었다. 숟가락과 젓가락들은 놓일 자리가 없어 그릇 사이사이로 빼꼼 고개만 내밀고 있었다. 상다리가 부러지도록 차렸다 라는 말은 이런 장면을 두고 말한 것이겠자.라고 생각했다. 진수성찬 주위로는 행복하고 즐거운 파티가 성대하게 치러졌다.

 집으로 돌아와 며칠 더 학교를 나간 뒤에도 그 생일상은 머릿속에서 지워지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붙잡고 말했다. 


 엄마 나도 그런 생일 해보고 싶어.


 무작정 '그런' 생일이라니, 문득 생각났다는 듯도 아니고 그동안 그런 아쉬움이 있었는데 이번 한 번은 그렇게 해보고 싶다는 입장표명도 아니고 세상에. 그냥 '친구가 받았던 것 같은 생일상이 있는' 생일파티를 하고 싶다는  말이었다. 그때의 나는 말의 무게가 내용에 따라 각기 다르다는 사실을 몰랐다. 모르지 않고서야 그런 말을 하지는 못했을 것이다. 엄마는 3만 원짜리 옷을 1만 원이 될 때까지 2년을 기다려 옷을 사는 사람이라는 것도 잘 몰랐다. 엄마는 조용히 눈길을 내리고 잠시 생각을 하다. 목에 힘을 주어 말했다. 까짓 거 엄마가 해줄게!

 다음 날, 학교에서 돌아오자 엄마는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방으로 들어와 가방을 놓고 정리하며 통화내용을 들어보니 호화로운 생일상을 받았던 그 친구의 엄마였다. 


 피자는? 아.. 두 판. 어어, 치킨도 시키고 어.. 중국집 같은 데서? 아 대충 요리 몇 개?...


 나는 그 통화의 의미를 알 수 없었다.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내 생일이 되자, 나는 하교하면서 친구들을 세네 명 데리고 집으로 돌아왔다. 누군가를 초대하는 방법도 잘 몰라서 그냥 하교시간이 임박해 가장 친하다고 생각하는 애들 몇을 불렀다. 그저 '그런' 생일파티를 할 수 있다는 사실에 어깨가 당당하게 펴졌다. 집으로 가는 내내 나는 엄마가 맛있는 것을 많이 해두었다고 반복해 말했다. 현관을 활짝 열자 거실에 작은 상이 차려져 있었다. 부르스타 위 큰 냄비에 어묵꼬치가 담가져 있고,  떡볶이와 닭봉 튀김들이 상을 채우고 있었다. 상 위는 듬성듬성 빈틈이 많이 보였다. 요리의 종류, 숟가락과 젓가락이 눈에 띄게 잘 보일만큼. 내가 생각한 '그런' 생일상은 아니었지만, 당시의 나는 만족스러웠나 보다. 우리는 생일 축하노래를 부르고, 케이크를 나눠먹는 것으로 파티를 마쳤다.


 즐거운 추억이냐고 묻는다면, 아니다. 어디까지나 나의 시점에서의 이기적인 이야기다. 엄마는 아들의 이야기가 무거웠다. 돈이 든다는 것을 알면서도 친구 엄마에게 전화를 걸어 자문을 구했을 것이다. 생활비가 모잘라 목 아래까지 물이 차오르는 시기였다. 그래도 아들이니까. 아들이 '그런' 생일 한 번 해보고 싶다는데. 돈이 대수였을까. 그래도 금액을 듣고는 놀라셨다. 어림잡아도 장정 열두명 먹일 배달음식이면 얼마나 시켜야 하는가. 엄마는 그래서 몇만 원어치 원재료를 사 와 전부 직접 요리하시기로 한다. 전부 만들어내면 되니까. 그렇게 많은 양의 요리를 해볼 일이 많지 않았다는게 문제였다. 그래서 평소보다 훨씬 오래 걸렸다. 내가 등교해서 하교할 때까지 꼬박 여섯일곱시간을 주방에 선채로 요리만 하셨다는 사실을 나중에 들었다.


우리 아들이 해보고 싶다는데. 


 철없는 말 한마디가 엄마에게는 미안함이 되어 박혔다. 그 미안함이 엄마에게 이상한 의지가 되어버렸다. 차라리 내가 상처를 받을 걸 그래도 우리 아들인데. 하지 말고 그래도 안 되는 건 안돼 했으면 좋았을걸. 아마도 그때부터였던 모양이다. 생일이 여느 날과 같았으면 차라리 좋겠다고 느낀 것은. 축하하는 사람에게도 축하받아야 할 사람에게도 아픔이 될 수 있다는 것을. 그리고 그게 다 돈 때문이라는 사실을. 돈을 많이 벌어야겠다고 생각했다. 돈을 많이 벌어서 다음 엄마 생일에는 내가 상다리 부러지게, 숟가락 놓을 자리도 없어서 보조 책상에 보조 책상을 놓고 겨우 둘러앉아 먹을 수 있는 진수성찬을 차릴 거라고. 속으로 그런 말들을 삼킨다. 돈이 조금 더 많아질 것 같으면 엄마에게 꺼낼 말들을 삼킨다. 


 웅. 웅. 웅. 웅.


어둠 속에서 핸드폰이 촛불처럼 밝아졌다 어두워지기를 반복한다. 잠금 화면에 읽지 않은 메세지들이 차오른다. 오후 11시 50분. 여느 날이 또 조용히 지나가는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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