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신익준 Dec 11. 2018

응 그러자.

그냥 네가 하자는 걸 하면 나도 재밌을 거 같아서.

"1월에 조금 덜 바빠지면 꼭 동네 시장을 가자."

"응 그러자."


 응 그러자, 그렇게 하자, 네가 하고픈대로 하자라는 말이 한 때는 미웠다. 그건 주관이 없어 보인다고, 데이트는 남자가 이끌어줘야 하는 거라고, 보통 소개팅에 나오는 여자들은 그렇게 생각한다는 말을 자주 들었다. 그렇구나. 내가 잘못한 일이구나. 맞아 남자답게 이끌어야 했어. 당시 나의 인생은 ~했어야 했다로 쉽게 설명할 수 있었다. 모든 행동과 말이 후회막심한 결과로 날 데려가는 느낌이었기 때문에 연애의 경우에서도 실수는 다 나의 잘못이라고 여겼다. 변명을 하자면, '너 하고픈 걸 하자'라는 말이 나에게는 '네가 뭘 해도 같이 하고파'라는 말이었으나, 상대에게는 그것이 '저 놈은 뭐 하고 싶은 것도 없는가'정도의 말로 전달된 모양이다. 물론 그것만이 이유는 아니었으리라고 본다. 그 외의 소소한 이유 (센스 없음, 옷 못 입음, 말 잘못함, 모솔 같음)로 소개팅에서 100%의 소박률을 자랑했다.

 이런 경험이 반복되자 당연히 트라우마가 되었고, 점점 이성을 만날 때 '무엇을 하자'라고 먼저 완곡하게 말해버리는 것이 버릇이 되었다. 확실히 완곡한 것은 편리하다. '무엇을 하자'라고 하면 대체로 '그래'라는 대답이 돌아왔고, 나는 또 잃어버린 남성성을 채웠다고 만족해하며 이성과의 만남을 지속했다. 다만 아쉬웠다. 이 말이 연애에서의 정석처럼 느껴지는 것이 아쉬웠다. 무엇을 할래? 와 같은 청유형도 아니고, 무엇을 할 수 있을까? 와 의문 제시형도 아니고 대체 왜 '무엇을 하자'와 같은 불친절한 문장이 정석이고, 남성성이고, 자신감이고 매력인가? 항상 그런 의문을 지울 수 없었다. 다만 생각만 그렇게 했고, 나는 따랐다. 연애가 하고 싶으면 연애 세계의 법을 따라야 한다고 생각했다.

 너를 만났을 때도 나는 '무엇을 합시다'라는 말로 너를 이끌고자 했다. 첫 만남부터 그 법칙이 깨질 줄은 몰랐지만. 사연은 이랬다. 지금까지의 수십 번의 소개팅처럼, 첫 만남은 역시 파스타라면서 강남의 맛집을 찾아 예약했다. 그리고 문자를 했다. '제가 예약해놨어요 8시에 파스타집에서 봐요'라고. 능숙하게 맛집을 예약하고, 정확하게 리드하는 내 모습이 잠시 자랑스럽기도 했다. 역시 사람은 경험이 있어야 한다며 스스로를 칭찬한 지 5분도 안돼서 소개팅 주선자에게 전화가 왔다.


"오빠 얘가 단 둘이는 무서워서 못 만나겠다는데 제 남차친구랑 그냥 넷이 같이 봐도 돼요?"
나는 약간 당황했지만 당황하지 않은 목소리로 대답했다

"응 그럼~!! 괜찮지!"
"아 저희 지금 강남역 스타벅스에 같이 있어요. 이쪽으로 오실래요?"

"응 금방 갈게!"


 나는 전화를 끊고 약속 장소로 이동하면서 원인을 분석했다. 너무 부담스러웠던 걸까? 내가 또 망친 것인가?? 그리고 스타벅스에서 너를 처음 만났다. 만나자마자 자신감 있는 얼굴로 악수를 하려고 했는데 바람일 뿐이었다. 나는 스타벅스에서 다른 고깃집으로 이동해 앉을 때까지 20분 넘게 네 얼굴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그리고 몇 번의 만남 뒤에 우리는 서로를 계속 만나기로 했다. 연애 후에도 첫 만남과 같은 일은 지속되었는데, 한 번은 서울 시내가 한눈에 보이는 멋진 뷰의 식당에 몰래 예약을 하고 멋진 목소리로 "점심은 근사한 데서 먹을 테니 따라와"라고 했는데, 너는 "오빠 그냥 너무 좋은데 말고 근처 식당에서 먹자"라고 대답했다. 나는 그날 두 가지를 얻었다. 아마도 너의 사주에는 '예약'이 없을 것이라는 추측과, 데이트 전에 남자가 맛집을 알아보지 않아도 괜찮다는 사실. 한 삼십 년 사는 동안 얼추 다 안다고 생각했는데. 너는 나에게 자꾸 놀라운 사실을 알게 하는 사람이었다.

 이런 일은 우리 연애사에서 계속 반복되었다. 내가 닫은 문장을 던지면 너는 그 문장을 독특한 방식으로 열어젖혔다. 나는 점점 닫은 문장을 버리고, 네가 하는 말을 보고 따라 했다. 너에게 말하는 법을 다시 배웠다.


 이번 주 수요일에는 널 만난다. 나는 또 으레 묻는다 그날 뭐 할까? 그럼 너는 말한다.  ooo 할까?  아 모르겠다 그냥 그 날 결정해. 사실 형식적인 문답이다. 어차피 그날은 네가 하자는 것을 할 거다. 배려, 무계획성 같은 게 아니라, 그냥 네가 하자는 걸 하면 나도 재밌을 거 같아서.


매거진의 이전글 소심해서 미안해요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