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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코즈모넛cosmonaut Oct 06. 2020

농부의 꽃, 대지의 꽃

시골 산책길에서 만난 꽃들

시골 산책길에서 만난 꽃들

주말만 되면 여주로 달려가는 이유가 있다. 서러운 도시의 노동에서 벗어나, 맑고 초연한 시골길을 산책하노라면 존재와 조우하는 환희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도시에서는, 노동의 터에서는 애쓰고 또 애써도 만나지 못한 것들을 여주에서는 그저 걷기만 해도 만날 수 있다. 


카메라를 들이대는 나에게 그 깊은 속내를 아무런 거리낌이나 가식 없이 드러내 주는 참 순박한 존재들. 하이데거가 말한 환의의 조우란 바로 이런 것 아닐까? 그들은 존재를 드러내고 나는 존재를 만난다. 뒤엉켜 풀지 못하는 속세에서 그저 인내의 습속으로 견뎌온 불쌍한 나라는 존재자는 그들 존재와의 환희로운 만남 덕분에 아주 오랜만에 자신의 참모습을 잠시지만 들여다보곤 한다. 행복이란 이런 것 아닐까.


고개 숙인 벼들 사이를 맛난 이슬이 머금어 들어가고 있다. 볏잎을 도르르 흘러내리거나 재미나는 듯 그 위를 뎅굴뎅굴 굴러다니는 이슬방울들을 보고 있으면 농부와 하나 된 자연의 소리가 선명하게 들리는 듯하다. 반년을 함께 해온 농부와 자연은 이렇게 서로를 머금으며 인간을 배 불리는 곡식으로 태어난다. 그저 게걸스레 먹어치울 것들이 아니거늘, 사유의 게으름으로 인해 우리는 밥알 하나하나의 존재성을 망각하고 산다. 아침 산책길에 만난 벼와 볏잎과 이슬은 농부의 꽃이지 않을 수 없다.


뚝방길 옆 아슬아슬한 땅조차 농부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신의 선물이다. 누가 돈에 눈이 멀어 땅 투기에 정신줄을 놓는단 말인가. 농부와 자연에게 땅은 어우러져 살아갈 엄마의 품과도 같은 존재다. 뚝방길을 산책할 때마다 코스모스와 함께 일렬로 하늘을 오르고 있는 들깨를 본다. 


그냥 지나칠 뻔하다가도 몸을 숙여 겸손한 마음으로 그를 마주하면 형상 그 자체로 꽃다움이 눈 속으로 스며들어 온다. 코로 향이 전해오지 않는데도 어느새 입 속에는 침이 고여 자연이 선사해준 맛을 느낀다.


집에 돌아가면 간장에 아주 조금 들기름을 올려 밥 한 그릇 먹어야겠다. 감사한 마음으로, 행복한 기분으로, 뚝방길에서 만난 그를 생각하며 말이다. 농부의 꽃들은 이렇게 우리의 마음과 몸을 살찌운다.


산책길 끝자락에 밤나무 한 그루가 기골이 장대한 장수처럼 서 있다. 살짝 벌린 입 속에 짙은 고동색 밤톨들이 빼옥이 들어찼다. 봄에 오른 잎을 통해 이 풍요의 가을이 오기까지 조용히 햇살을 머금고 스스로를 살 찌운 생명의 애씀들이 가시 껍질을 툭하고 터내을 만큼 알차고 또 알차다. 


새에게 쪼일세라, 벌레에 갈퀼세라 가시 돋친 집을 짓고 반년 넘는 세월을 인내한 그들. 이제 생명의 순환을 향해 조심스레 문을 열기 시작한다. 비루한 인간조차도 새 생명이 태어날 때면 환희와의 조우에 눈물 흘리거늘 어찌 밤톨 하나의 탄생에 감동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산책을 매듭지으며 순환의 큰 의미에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다.


한 시간여 걸었나, 빠르지도 늦지도 않은 걸음 덕에 몸은 가벼워지고 가슴은 꽉 차오른다. 아침 산책만으로도 농부의 꽃을 배우며, 도시의 먼지를 훌훌 털어낼 수 있음에 어찌 감사해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소파에 걸터앉아 사진기에 담아온 개망초꽃의 싱그러움, 이름 모를 들풀의 주황빛 미소를 감상한다. 그 어떤 인공의 꽃보다 단아하고 맑은 아름다움이지 않을 수 없다. 다리에 힘이 남아 있는 한 그들을 만나러 길을 나서야지...... 대지의 꽃은 잡초라 불리지만 인정받으려 애쓰지도 나대지도 않은 채 그날도 피어 있을 테니까.


언젠가 나의 노동도 대지의 꽃들처럼 인정받으려 애쓰지도 나대지도 않는 그런 자연스러움이 되어주겠지. 오늘 산책길에서 만난 환희의 존재들이 날 가르치고 위안한다. 믿음이란 이렇게 다가오는 것. 잘 생각해보면 그 믿음이 우리를 살아가게 만드는 근원의 힘이다. 찬란한 농부의 꽃, 대지의 꽃들이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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