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 우리는 너무 많은 것을 잃어버렸다

잃어버린 것들 위에 다시 세워야 할 것들

by 이키드로우

어른이 되면서

나는 많은 것을 내려놓게 되었다.

세상에 대한 기대를 조금씩 접었고,

상처받지 않기 위해 마음에 벽을 세웠으며,

사람을 쉽게 믿지 않는 태도를

성숙함이라 부르기 시작했다.


착하면 손해를 본다는 말을

진리처럼 받아들이게 되었고,

정직함은 미숙함으로 여겨지기 시작했으며,

선의와 호의는 조심해야 할 감정이 되었다.

그 순간부터

세상은 기대를 걸어도 되는 대상이 아니라

신중하게 거리를 두고 경계해야 할 대상이 되었다.


그래서 나는

세상을 등지고 싶어지기도 했고

세상에 무엇이든 기대하지 않는 쪽을

선택했던 것 같다.

기대하지 않으면

실망할 일도 줄어들 테니까.


하지만 그렇게

기대를 접고 살아가다 보면

어느 순간에는

희망 자체가 희미해진다.

세상을 믿지 않겠다는 선택은

곧,

세상과 나 사이의 거리를

계속해서 벌려놓는

일이 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끝내 세상을 완전히 등지지 않는

사람들이 있다.

실망한 채로,

의심한 채로,

그래도 다시

세상을 있는 그대로

마주하기로 선택하는 사람들이다.


나는 그런 사람들이

진짜 어른이라고 생각한다.

어른이 된다는 건

기대를 끝까지 붙잡는 것이 아니라,

기대가 깨진 이후에도

희망을 품은 채

삶을 계속 살아내는 일이라는 걸

깨닫게 되었기 때문이다.


어릴 적에는

세상에 대해 많은 희망을 가지고 있었다.

노력하면 그대로 보상받을 거라는 믿음,

진심은 언젠가 통할 거라는 기대,

사람은 기본적으로 선하며

세상은 살만한 곳이라는 생각.


현실 앞에서

그 생각들은 터무니없이 쉽게 부서졌다.

내 기대와 너무 달랐던 세상을 보며

세상에 걸었던 희망들을

갈기갈기 찢어 쪼개서

쓰레기통에 처넣어 버렸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

몇 걸음 떨어진 채 세상을 바라보니

그 모든 희망들이

사라진 것은 아니었다.


나는 다시 쓰레기통을 뒤적거렸다.

다시 찾고 싶은 희망도 있었고,

다시 찾을 수는 없지만

다른 형태로

내 안에 남겨두고 싶은 것들도 있었다.

어른이 된 지금

순진할 수는 없지만

계속 유지하고 싶은

순수한 어떤 것들.

세상의 부조리와 어두움을 잘 알면서도

세상에 대해

완전히 마음을 닫지 않는

태도 같은 것.


어른이 된다는 건

많은 것을 잃어버린 지점에서

멈추는 것이 아니라,

온갖 기대화 희망이 무너진 자리 위에

어떤 기준으로 다시 그것들을

세울 것인지를

스스로 결정하는 일일지도 모른다.


너무 빨리 어른이 되어버린 우리가,

지금의 자리에서

어떻게 다시 제대로

살아갈지를 묻기 위해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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