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래도 착한 사람이 되는 법
나는 갈등을 키워서
문제로 만드는 사람이고 싶지 않았다.
어려서부터 교회에 다녔던 나는
성경에 나오는
‘할 수 있거든 너희는 평화하라’는 말이
늘 내 마음 한쪽에 자리 잡고 있었다.
학창 시절부터 사회생활을 하던
30대 초중반즈음까지
어린 시절부터 가졌던 평화에 대한 믿음을
유지하고 있었다.
그래서 가능하면 내가 양보했고
조금 손해 봤고
조금 더 기다렸고
상대를 이해하려고 애썼다.
그러면 나아질 줄 알았다.
상황이든 관계든
나의 물러섬으로 인해
큰 갈등 없이
좋아질 줄 알았다.
하지만 현실은 다르게 흘렀다.
문제는 사라지지 않았다.
되려 여러 가지 문제들을
어느 순간 내가 다 떠안고 있었다.
양보하고 이해하려 할수록
상대는 책임의 자리에서 더 물러났고
상황은 더 꼬여가는 경우가 부지기수였다.
쌍방 간의 평화를 위해 내린 거라 믿었던 선택이
결국에는
나 혼자 참아야 하고 짐을 져야 하는 구조로
굳어갔다.
몇 번의 비슷한 사건을 겪고서는
‘착하면 손해 본다’라는 말이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삶의 진리처럼 다가왔다.
30대 중반에 이르러
참아왔던 마음들이 폭발했다.
더 이상은 같은 방식으로 손해 보고 싶지 않았고
내 마음을 다치게 하기 싫어서
이기적으로 살아보리라 다짐했다.
물러서지 않았다.
갈등 앞에서 호랑이가 된 마냥
하고 싶은 말들을 뱉어내고
싸워야 할 때는 싸워야 한다는 마음으로
내 삶을 가득 채웠다.
확실히 덜 아팠다.
갈등도 줄었고
불필요한 감정 소모가 눈에 띄게 사라졌다.
하지만
마음이 조금씩 닫히기 시작했다.
세상과 사람에 대한 신뢰가 무너지기 시작했고
나 자신에 대한 신뢰마저 함께 무너지기 시작했다.
타인을 조금도 이해하려 하지 않고
내 삶의 기준보다 눈앞의 상황을 먼저 계산하게 되었다.
문제는 착함 자체가 아니었다.
분별력 없고 어리석었던 나의 미숙함은
착함과 우둔함을 구분하지 못했고
평화와 회피를 헷갈려하고 있었던 것이다.
어린 시절부터 잘 유지해 왔던 평화에 관한 말씀은
여전히 진리인 것을 이젠 안다.
또 착하면 손해 본다라는 말 역시
틀린 말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그 착함을 제대로 다시 정의하는 것이다.
타인에게 좋은 평가를 받는 것이 우선이 아니라
자신에게 정직하고 제대로 된 삶의 기준을
가지고 있는 상태인지를 늘 점검하는 것이
착함의 새로운 정의로 내 삶에 자리 잡았다.
잠깐의 갈등상황이 생기더라도 회피하지 않고
내 기준에 따라 할 말을 하며
갈등을 해결하는, 어른의 지혜가 필요함도
이제는 알게 되었다.
그래서 나는
굳이 나쁜 사람이 될 필요 없이
착하고도 손해를 보지 않는 어른이 되기로
결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