잃어버린 기다림에 대하여

시간이 약이라는 말을 그대로 믿어버렸을 때

by 이키드로우

어릴 때 나는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을 자주 들었다.

상처도, 갈등도, 후회도

시간이 지나면 괜찮아진다고.

그래서 나는

시간이 모든 걸 해결해 주는 줄 알았다.


어릴 때는 그 말을

꽤 순진하게 받아들였다.

기다리면 된다는 뜻으로,

말 그대로 기다리면서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는 말로.


그래서 문제가 생기면

조금 더 두고 보자는 쪽을 택했고,

상황이 불편해지면

시간이 알아서 정리해 줄 거라 믿었다.

그게 어른스러운 태도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시간이 지나도

아무것도 변하지 않는 일들이 있었다.


어떤 관계는

악화된 그대로 계속 유지되었고,

좋지 않은 상황도 그대로였다.

시간이 흘러 뭔가가 좋아진 게 아니라

그냥 방치되거나

더 악화된 것에 가까웠다.


몇몇 상황들을 지켜보고서야

‘시간이 약이다’라는 말이

내가 이해한 방식과는

조금 다르다는 걸 알게 되었다.


시간이 약이 되는 경우는

정해져 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

이미 내 손을 떠난 결과들,

되돌릴 수 없는 선택의 이후 상황들

그런 것들 앞에서는

시간이 필요했다.

억지로 붙잡아도

해결되지 않는 영역이기 때문이다.

혹여 악화된다 해도

내 컨트롤 밖의 일들은

어쩔 수 없다고 받아들여야 함을

알게 되었다.


또 어떤 것들은

칼로 자르듯 해결할 수 없는 문제였다.

사람의 감정처럼,

서로가 생각하고 받아들일

시간이 필요한 일들도 분명히 있다.

그럴 때의 기다림은

회피가 아니라

존중에 가까웠다.


문제는

그 구분을 하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내가 통제할 수 있는 것과

통제할 수 없는 것을 나누지 않았고,

내가 책임져야 할 영역과

시간에 맡겨야 할 영역을

섞어버렸다.


그 결과

아무것도 하지 않는 기다림이

정답인 것처럼 믿고 살았었다.

하지만 그건

시간에 맡긴 게 아니라,

책임을 미룬 것이었다.

기다림이 아니라

도망에 가까운 선택이었다.


시간은

약이 될 수도 있지만,

모든 증상에 쓰는 만병통치약은 아니다.

어떤 문제는

시간이 지나야 낫고,

어떤 문제는

시간이 지나면 더 늦는다.


지금의 나는

문제가 생기면

먼저 나눈다.

이게

내가 할 수 있는 일인지,

아니면

시간이 필요한 일인지.


내가 움직여야 할 문제를

시간에 맡기지 않고,

내가 통제할 수 없는 것들은

억지로 붙잡지 않고

시간에 맡겨보려 한다.

그리고 그 결과에는

순복 하려 한다.


시간은

책임을 대신해주지 않는다.

다만

내 몫을 다한 이후에는

실제로 시간은

약이 될 수 있다는 걸

조금 늦게 배웠을 뿐이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