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멘토모리, 카르페디엠
그래도 살아가야 한다.
어쩌면
살아가야 할 이유보다
살지 말아야 할 이유가
많을 수도 있다.
그래도 생을
쉽게 포기 않는 이유는
이 생은
‘주어짐’ 받았기 때문이다.
내 인생은 내 것.
틀린 말은 아니지만
엄밀히 따지만
반은 맞고 반은 틀리다.
내가 주도해서 살아야
한다는 점에서는 내 인생이 맞지만
주어짐을 받은 인생이란 점에서
삶은 온전히 내것은 아니다.
삶은 늘 내게
과제를 부여한다.
이런저런 사건이 속에
삶을 힘들게 하는
폭탄들이
여기 저기서 팡팡 터진다.
그래도
살아 있는 한 살아야 한다.
살아 있는 한 방법은 있다.
나는 죽음을
그다지 두려워하지 않는다.
삶의 미련이 없는 편이다.
삶의 미련이 많아
그래도 살아야 한다고
말하고 있는 게 아니다.
우린 언젠가 죽게 되고
또 그 언젠가가 언제인지 모른다.
조금 뒤? 내일?
일주일 뒤?
알 수 없다.
어떤 이유, 어떤 상황에서
어떻게 죽게 된다 해도
이상할 건 하나도 없다.
생은 원래가 유한하고
인간의 존재는 원래 ‘필멸’이니까.
그래서 나는 늘
죽음을 가까이 둔다.
삶의 다양한 선택지들 앞에
내게 적합하고 나다운 선택을 하기 위해
나는 늘 이렇게 질문한다.
‘이 일을 안 하면(혹은 하면)
죽을 때 후회할까?‘
질문은 심플하지만
이 질문에 대답하는 것은
상당한 훈련이 필요하다.
‘잘 사는 것’과
‘잘 죽는 것’의 기준이
명확하게 서 있지 않으면
저 질문은 효력이 없다.
삶과 죽음에 대한 기준이 명확할 때
우리는 ‘죽을 때 후회하는 것’에 대해
제대로 답할 수 있다.
‘메멘토 모리’를
마음에 새기고 살 때,
자연스럽게
‘카르페디엠’이 따라온다.
죽음을 가까이하는 것은
두려움과 무서움에 잠기기 위함이 아닌
지금 현재,
내게 주어진 삶을 잘 살기 위한
가장 현명하고 지혜로운 선택인 것이다.
내게 주어진 삶,
내게 부여된 과제들을
죽음(삶의 유한성과 필멸성)을 기억하며
‘그럼에도 불구하고’
잘 살아보도록 하자.
잘 살아보자,
잘 살아보자
소리치는 건
지금 삶이
그렇지 못해서,
나 스스로에게 계속
되뇌며
머리와 가슴에
다시금 새기기 위함이다.
혹여
삶과 삶의 과제 앞에
절망하고 힘들어하고
무너지고 있다면
그래도 살아 있기를
살아가기를 권한다.
내가 뭔가 지혜롭거나
당신보다 나아서가 아니라,
그게 ‘주어짐’을 받은
우리네 생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라 생각되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