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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Aug 18. 2024

변신 기미


얼마 만에 소파 무릎에 기대어 동물농장과 진품명품 콤비를 들여다보는지 모르겠다. 이 시간에 이럴 수 있다는 건 대충 마음이 편하다는 소리다. 가장 안전한 일요일 아침의 느낌. 왜 둘의 방영시간이 겹치게 된 건지 투덜대보기도 한다. 오늘 하고 싶은 일은 다했다. 다 살았다. 새벽 두 시에 일어났기 때문이다. 일어나자마자 환영한다는 듯 참매미 한 마리가 나지막이 울었다. 두터운 어둠밭을 뚫고 기어이 새벽으로 나왔구나. 너도 축하하고 환영한다. 환대해 줘서 고맙고 목소리를 들려줘서 고맙구나. 변화는 나보다 네가 훨씬 더 잘 느끼겠지만 혹시라도 당장 혼자 운다고 위축되거나 두려워하지 마라. 조금만 지나면 밝아지니까. 다 함께 울게 될 테니까.


오래전 시장에서 일하던 기분이 났다. 그때도 이 무렵에 깨어 움직이곤 했다. 시장의 활기가 내 안을 살며시 돌아다니며 매듭을 풀고 천막을 벗기고 낡은 램프와 간판불을 하나씩 건드려보는 듯했다. 두 달 넘게 이어지던 불면증은 어느새 잦아들었고 동시에 무력감에서도 얼만치 벗어난 것처럼 느껴진다. 그래도 들뜨지 않고 새벽과 하나 되어 고요히 하루를 시작한다. 무언가 다시금 변했다는 것이 아직 실감 나지 않는다. 변신하는 중에는 조심해야 한다. 요즘 악당들은 변신할 때를 두고 보지 않기 때문이다.


커피를 내리고 자리에 앉아 들어지는 음악을 틀고 읽혀지는 것을 읽는다. 화분에 물을 주고 할 일을 마친 꽃과 잎들을 어루만져 한 데 쓸어 모았다. 느닷없이 숲에 가고 싶었다. 그러고 싶다. 하고 싶다. 두 번 다시 품을 수 없다던 마음은 또 무엇으로부터 잉태되고야 말았나. 비로소 여름이 다한 건가. 그 지독하고도 긴 하루가 드디어 끝났나. 해치웠나. 어제 미용실 아줌마도 그랬다. 요 며칠 아침 기운이 조금 달라진 것 같지 않느냐고. 나는 어느새 수시로 머리칼을 귀 뒤로 넘겨야만 하는 단발머리가 되어 있었다. 귀 뒤로 자꾸 넘기다 보니 무거운 달력 넘어가듯 완전한 뒤안길로 넘어가 버린 것이다. 다음의 변화로써 지난 변화에 뒤늦게 적응하게 된 것이다.



동틀 무렵 숲에 왔다. 여름 다 끝나가는 마당에 이제야 떠나는 계절을 허용한다. 옛날부터 그랬다. 어른이 처음 보는 아이와 놀라고 방에 떠밀면 나 홀로 안절부절 어색해하다가 헤어져야 할 시간이 다 돼서야 비로소 재미있게 놀기 시작했다. 놀 만하니 어른이 집에 가자고 했다. 누구를 향한 원망인지 알 수 없는 울음을 터뜨려야만 했다. 변화를 받아들이기 위해 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했다. 변화에서 살아남을 변신을 하기 위해 변화의 마지막 안간힘까지 확인해야 했다.


살아오며 줄곧 허용이라는 말을 갖고 싶었다. 비슷하게 알아차림, 수용, 받아들임, 내맡김, 내려놓음, 다 좋은 말이었다. 그러나 스스로 느끼기에 충분하지 않았다. 말을 고치니 한결 수월해졌다. 의미 너머의 세계, 이미지가 마음에 들어야 한다. 예컨대 수용이 흡수하는 느낌이라면 허용은 통과하는 느낌이다. 수용은 마음을 가볍고 예쁘게 쥐려 애쓰는 느낌이고 허용은 손바닥을 펼치고 있다. 배출이 원활하지 못할 때 몸에 병이 나는 것처럼 수용이라는 마음도 그렇다. 수용은 밀가루음식처럼 탈이 나는 음식에 중독되는 것과 같고 허용은 흰 죽 같다. 수용이 일방통행이라면 허용은 양방통행, 수용이 종이컵이라면 허용은 빨대다. 이처럼 나에게 유효하고 유리한 단어를 가능한 많이 찾아내야 할 필요가 있다. 인류의 도약은 언어였고 따라서 이미 약속된 의미도 중요하지만 결국 자신 만의 언어를 새로 맞이하고 창조해야 한다. 우리는 지금이 태초이기 때문이고 언제나 그래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기 때문이다. 글을 쓰든 사업을 하든 뭘하든 본질은 같다. 언어 이전에 언어가 될 고유한 의식을 깨닫고 지키고 계발해야 한다. 그것은 질서나 유행에 없다. 각자의 상자 속에 담겨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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