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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잭 라 이르 Aug 20. 2024

뜻밖의 여정

/1036/write... 몰랐다. 작성 횟수가 어느새 1,000번을 넘겼다. 1,000번의 작은 떨림이 몇 번의 부끄러움을 만들어냈다. 이곳에 꾸준히 기록을 남겨 온 지도 어느덧 2년이 다 되어간다. 매일 무언가 내뱉지 않으면 안 됐다.


처음은 누구나에게 좋은 무언가를 주고 싶다는 순수한 마음이었다. 지금이야 그것이 사랑임을 알고 있지만 성급하고 서툴렀던 마음은 금세 욕망이 됐다. 그래서 잘 안 됐다. 좋은 걸 주려면 지금까지 내가 믿었고 덧입고 쌓았던 좋은 것들을 모조리 해체시켜야만 했다. 때로는 봉쇄수도사처럼 고독에 투신해야 했다. 고독의 바퀴는 끝없는 질문과 성찰이었다. 돋보기를 들고 내면 곳곳을 세심하고 집요하게 관찰하면서도 한 자리에서 지그시 햇빛을 모을 줄도 알아야 했다. 그러한 몰입 덕분에 꼬박 6년을 억지로 삼켰던 정신과 약도 끊을 수 있었다. 돌아보면 재료와 타이밍이 좋았다. 단약의 요동과 명상과 글쓰기는 시너지를 냈다. 그것들이 어느 날 내 몸, 나의 우주 어딘가에 작고 빛나는 점을 만들어냈다. 불안과 혼란이 극에 달하고 또 잦아들길 반복하며 흡입 압축 폭발 배기의 피스톤 운동이 저절로 이루어졌다. 극과 극의 역동성이었다. 그것이 새로운 무언가가 탄생하는 조건에 부합했다고 생각한다.

언젠가 밝혔지만 그것은 간헐천처럼 가늘고 불규칙하게 뛰며 무수한 기포를 만들고 터뜨리기를 반복했다. 그러다 오랜 정적을 지나 예상치 못한 순간에 화산처럼 한꺼번에 폭발했다. 정신의 해방이었다. 강렬하고도 아름다운 해방의 모습들이 비로소 세상 어디에나 보이고 온몸의 감각으로 선명히 느껴졌다. 진실은 이미 언제나 어디에서나 일어나고 있었고 끊임없이 자신을 드러내고 있었다. 간헐천도 꽃도 나비도 매미도 가재도 달걀도 모든 생명이 내부의 지난한 떨림으로 깨어났다. 떨림은 고통이자 설렘이었다. 이 순간 세상 전부가 통째로 나이자 거대한 의식의 활동임을 가슴으로 자연히 알게 되었다. 모든 의문이 일순간에 해소되며 용서와 자비를 알게 됐고 그로부터 한동안 진정한 자유와 사랑을 맛볼 수 있었다.

나에게 일어난 이 의미심장한 일이 무엇인지 알고 싶었다. 그 마음은 차츰 마음에 대해, 우주에 대해, 이윽고 영혼, 영성이라 불리는 것에 닿아 있었다. 그것은 산책하다가 발견한 처음 보는 버섯의 이름이 무엇인지, 또 먹어도 괜찮은지 툭툭 건드려보는 호기심처럼 자연스러운 것이었다. 내가 겪은 일은 앞서 체험한 사람들이 이름 붙이기에 따라 깨달음, 거듭남 등으로 불려지고 있었는데 그것이 많은 사람들이 추구하는 일이자 조금은 특별한 체험이라는 것도 알게 되었다. 참 다행이었다. 적어도 내가 미친 게 아니었다는 안도감에 감사했다.


이 과정에서 미신이나 사이비, 신내림 등에 대해서도 조금은 짐작할 수 있었다. 그것은 매미가 허물을 찢고 나와 벗겨진 세상을 처음 맞이했을 때의 혼돈이자 빛의 유혹일지도 모른다. 그만큼 압도적인 신비로움과 맞닥뜨리게 된다. 나에게도 한동안 숫자가 따라다녔다. 또 주파수를 감각한다거나 남들이 보고 듣지 못하는 것을 예민하게 감지해 냈다. 예리해진 직감에 더불어 저절로 알게 된 자연계의 원리 법칙을 가지고 예언이나 점성, 점술 따위를 흉내 내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다만 빛에 삼켜진다거나 적절히 안정시키지 못한다면, 망상을 알아채지 못하고 현혹된다면, 믿음의 방향이 자신을 향한다면 스스로를 특별한 존재로 여기고 그로부터 부자연스러운 일들이 벌어질 수 있었다.


좀 더 과거로 거슬러 올라가 보면 나는 언제나 큰 고민 없이 생업에서 빠져나오곤 했다. 어느 시점에 다다를 때마다 삶이 고작 이게 전부일 리가 없다고 생각했다. 사회적 통념을 성실히 걷고 있는 사람들에게 물어도 만족할 만한 답은 얻을 수 없었다. 이런 식이라면 그들과 같이 스스로 책임을 만들고, 마치 십자가를 지고 그것을 가볍게 만들기 위해 앞뒤 가리지 않고 함부로 살게 될지도 몰랐다. 나는 결국 나에게 물어야 했다. 그리고 오래전에 미처 마치지 못한 작업에 다시금 몰두하기 시작했다. 여전히 그러고 있지만 나날이 새롭게 받아들여지는 것도 있다. 나에게 일어난 일들은 자연히 변화할 때가 되었기 때문에 일어난 것이고 새로운 삶의 방식에 적응하려는 생명의 자연스러운 모습이었다. 초월적인 무엇이 아니라, 어떤 수준에 이른 것이 아니라, 신을 만난 것이 아니라, 다만 인간성을 회복하는 과정이라고 말하고 싶다. 무엇이 되었건 나는 전과 같은 삶으로 돌아갈 수 없음을 안다. 나는 여전히 본성으로 향하는 길에 서있다. 이 좁고도 넓은 길에서, 짧고도 긴 여정에서, 가능한 모든 순간에서 나를 발견하고 감응하고 감격하고 싶다. 나이자 세상인 존재에게 기꺼이 소모되고 싶다. 나는 아직도 잘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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