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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희잭 라 이르 Aug 24. 2024

다윗의 노래

(삼하1~24)

이제 다윗도 갈 때가 되었는가 실컷 노래를 지어 부르더니 인구조사를 실시한다. 인구조사는 모세를 비롯한 앞선 통치자들도 죽기 전 으레 행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아무래도 갈 때가 되면 치적을 헤아려 보고 싶어지는 모양이다.


그런데 인구조사가 뭐 어쨌길래 다윗은 양심의 가책을 느꼈을까. 왜 여호와께 그것을 죄로써 고백했나. 이 역시 이스라엘 민족을 하나의 몸으로 고쳐 생각해 본다. 그러면 인구조사란 내 안에 무엇이 얼마나 어떻게 있나 따져보는 셈이다. 세포가 몇 개고 머리숱은 얼마나 풍성하고 키는 얼마나 자랐고 몸무게는 지난달에 비해 어떻고 근육은 비싼 기관인데 아깝지 않게 잘 기능하고 있는지 관절은 부드러운지 아픈 곳은 없는지 따위를 알기 원하는 것이다.


내가 내 몸뚱이 알고자 하는 게 왜 죄일까. 진짜 나는, 하나님은 헤아릴 필요가 없기 때문이다. 하나님이 다윗으로 하여금 행한 일들을 다윗은 충동으로 자신의 공적인양 거짓 인간의 눈으로 헤아리고자 했다. 앎은 판단의 기준이 된다. 앎은 구분 짓고 명명하려는 욕망으로 이스라엘 민족이 번성하듯 끊임없이 분화되어 불어나게 된다. 앎은 온전한 하나의 의미가 아닌 깨진 유리조각 같은 것에 의미와 가치를 부여하기 시작한다. 그 역시 투명한 데다 멀리서 보면 반짝반짝 빛나 보이기 때문이다. 앎은 유리조각을 쥐는 것과 같다. 필연 고통받게 돼있다. 추구할수록 영혼은 망가지게 돼있다. 앎은 선악을 시작으로 참과 거짓, 수많은 상처와 편견과 장애를 만들었다. 몰라야 알게 되는 것을 그릇된 문자와 셈으로 유도하여 진정한 앎으로 거듭나지 못하게 방해했다. 앎의 수준은 인간을 구별하고 그것이 존재 의미인양 착각하게 만들고 그로부터 받지 않아도 될 고통을 받으며 삶을 더욱 어렵고 복잡하게 만든다. 그러는 동안 본래 갖춰졌어야 할 앎이자 인간 고유의 감각은 희미해진다. 정서, 교감, 사랑, 인간의 본능을 낮잡고 쓸모없는 것으로 강등시킨다. 그러니 우울하지 않을 수가 있나. 본래면목대로 못 사는데. 이 나라는 거짓으로 치장하지 않으면 부끄러워 살 수가 없나 보다. 자존감이 거짓에서 나온다. 고통스러워도 그러기로 약속이라도 한 모양이다. 고통의 수준으로 사람을 분간한다.


앎은 확장이고 확장된 앎을 다스려 평화를 얻으려면 인간의 본성이 필요하다. 아는 것이 힘이긴 한데 대부분 힘을 얻는 것에서 그친다. 힘의 질서는 오래가지 못한다. 힘은 또 다른 분열을 낳는다. 확장, 분열시켰으면 힘이 아닌 다른 것으로 전체를 통합해야 한다. 신체, 정신, 사회 모두 마찬가지다. 어느 날이었다. 가슴이 열리고 눈이 뜨이고 난데없이 목소리도 활짝 트였을 때 확장된 음역을 다스리기 위해 몸을 보다 면밀히 감각할 필요가 있었고 머지않아 호흡의 안정화로써 온몸으로 예쁘게 노래하는 법을 터득했다. 그걸 깨닫지 못하면 제멋에 취해 빽빽거리는 개돼지나 다름없다.


다윗이 죄를 고백했지만 앎은 결국 수많은 죄를 지었다. 때문에 오늘날 죄인 아닌 사람이 없다. 앎만큼 비겁하고 무지한 것이 없다. 우리에게 다윗처럼 죄라도 고백할 수 있는 양심이, 그래 성경 읽었으니 성령이 임하길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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