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아회재 Aug 23. 2024

비겁한 가르침

그 말은 기원이 없었다. 적어도 심해 열수구에서 나온 것은 아니었다. 그 말은 이따금 들려오는 가느다란 신음을, 불현듯 찾아오는 의문을, 당장의 고통을 잠재우는 데 탁월했다. 많은 사람들이 그 말에 의존하게 되었고 일시적인 위안을 얻어가곤 했다. 그들은 어렵고 불편한 것을 싫어했다. 쉽고 편리한 것이 좋았다. 때문에 기꺼이 속을 수 있었다. 그들은 새빨간 눈을 하고 새빨간 믿음을 가지고 새빨간 미끼 주변에 몰려있기로 했다. 간혹 새빨간 다툼이 일어났지만 거기서 만큼은 누구라도 새빨간 인내심을 발휘했다. 수면 가까이 올라온 이상 버티지 못하면 새파랗게 가라앉게 될 거였다. 모두가 가라앉기를 두려워했다. 새파랗게 이글대는 기원에 닿기를 두려워했다.


그 말은 기질적으로 직장가에서 주되게 돌아다녔다. 때로는 특정 분야의 권위자에게서도, 부모나 지인, 친구들에게서도 곧잘 달려나왔다. 그 말은 중세 갑옷처럼 경직되고, 진지하고, 멋있고, 위엄 있어 보여야 했다. 그래야 적으로부터 스스로를 보호할 수 있었다. 그러나 적은 자신 안에 있었다. 전쟁은 늘 갑옷 안에서 일어났다. 갑옷이 전쟁으로부터 저를 지킬 줄로 알았지만 그것은 전쟁을 존속시키고 평화의 가능성마저 가둬버렸다.




새 눈을 갖게 된 뒤로 머지않아 수많은 얼굴들이 줄줄이 떠올랐다. 그리고 곧장 그 얼굴들에게 사과해야만 했다. 전화로든 문자로든 만나서든 몇날며칠이고 그것을 했다. 나를 말릴 수 없었다. 평생 누적된 죄의 성분이 몸 밖으로 쉴 새 없이 쏟아져 나왔다. 셀 수 없는 모래알이 생살을 벗기며 쓸려나갔다. 피눈물이 뭔지 그때야 알았다. 그러나 피눈물로도 가장 사랑했던 사람과 사랑으로 빚어진 존재는 다시 만날 수 없었다. 그에게 죄를 지어야 했던 것 역시 비겁한 사람들의 말에 홀린 나의 어리석음 때문이었다.


'아버지, 저를 용서해 주십시오. 저는 제가 하는 일을 모르고 있었습니다.'


어떤 죄는 내 안에 영원히 품게 된다. 그러다 다음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라는 의식은 그 죄로부터 깨어날 것이고 자연히 허물을 벗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필연 그 삶에서 또 다른 업을 쌓는다. 만약 그렇다면 전생이나 내세, 환생 같은 이야기도 그저 허무맹랑한 소리만은 아닌 것이다. 탄생과 죽음, 입자의 끊임없는 분열과 통합, 무수한 진동, 그 과정에서 의식, 기억, 기능의 연결도 자연히 다른 형질이 되거나 아예 소멸해 버릴 것이다. 새로 눈을 떴을 때 신생아처럼 통곡했고 천진한 아이처럼 세상 모든 것이 낯설고 신비로웠던 경험을 확장해 생각해 보면 그렇다.

잘 자려면 잘 살아야 하듯 또한 잘 살려면 잘 자야 한다. 마찬가지로 잘 태어나려면 잘 죽어야 하는지도 모른다. 티벳에서는 수행자들을 장사 지낼 때 독수리에게 시체를 던져 준다. 과연 그들은 지금 무엇으로 존재하고 있을까. 정신은 어떻게 와해되고 무엇으로부터 재탄생하는 걸까. 몸은 왜 죄와 벌의 굴레에서 끊임없이 서로를 먹고 뱉어야만 하는걸까. 노을과 여명의 뜨거운 경계에서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텅 빈 가슴만 울리고 있다.



매거진의 이전글 아니야 그래도 돼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