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복을 꺼냈다. 묵은내가 나서 후딱 손빨래해다가 입었다. 따듯했다. 따듯해서 아침에도 낮에도 초저녁에도 자꾸 졸음이 왔다. 졸음이 올 때마다 잠들기를 내버려 두었다. 움직여야 하는데. 이거그거 하기로 했는데. 운동과 일기 따위가 없으면 똑바로 살 수가 없구나. 불쌍해라. 더러워지고. 나빠지고. 안 살고 싶고. 멀어지고. 안 보이고. 별도 구름에 가리워. 별을 가리운 흐리멍텅한 구름. 게으름의 속성인 걸 안다. 게으름이 무엇으로 만들어졌는지도 안다. 내가 게으르지 않다는 것도 안다. 그 분노와 절망에 하얗게 깨어 있다.
서울을 떠나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스물네시간 삶에 미친자들이 너무 많아서 못 살겠다. 얼마나 빨리 죽고 싶길래 저럴까. 젊음/ 성공/ 사랑/ 패기/ 놀구 있네 흐리멍텅이들. 처먹고 달리고 안 처먹고 달리고 처먹고 안 달리고... 살 틈이 없다. 나는 죽을 틈이 없고(저들의 틈을 빼앗아버리고 싶기 전에 어떻게든...).
인간은 동전이다. 첫째로 거의 서질 못한다. 둘째로 앞면 아니면 뒷면이다. 납작하고 무거워 여간 뒤집히지 않는다. 극단적이며 앞면뒷면을 시간성으로 보더라도 순간에 머물지 못한다. 인간이 하는 순간에 머물기란 고작해야 손가락으로 동전을 튕겨 회전시키는 것이다. 별처럼 둥근 허상을 만들어내는 것이다. 허상이 흩어지지 않게 애쓰는 것이다. 진실은 곧 두려움이기 때문에 평생 채찍질해야만 한다. 동전을 절로 세우는 것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 아니다.
아브라함 헤셸은 인간이 절망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길에 대해 ‘자신이 목적이 되는 것이 아니라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라 말했다. 더욱 나에게는 쉽지 않은 얘기로 들린다. 존재가 스스로로부터 유리되어 있다면 그에게 남이란 대체 무엇을 지칭하는 이름인가. 당신과 나, 그밖에 모든 개념들의 경중을 따질 수 없으며 그렇다고 나 또한 동등한 남이니 나에게 먼저 필요한 존재가 돼야겠다, 나를 사랑하자 따위의 마음을 먹는다면 의미는 몸을 통과해 똥이 된다. ‘나’의 등장은 똥의 탄생이다. 거름이 아닌 똥(이런 개똥철학 같은 거).
남에게 필요한 존재가 되는 것이 절망을 피하는 길이라면 현대 사회는 존재를 절망케 한다. 어설픈 개인주의와 토착의 정情이 맥락 없이 뒤섞여있다. 발행연도가 제각각인 그러나 똑같은 때를 묻힌 동전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다. 기술은 개인을 개인에 머물게 하고 또 그래서 누구나 혼자이길 바란다. 인간은 할 수 없는 홀로 서는 동전이 되길 바란다. 바람대로의 혼자는 남에게 필요하지 않은 존재로 면이 뒤집혀 인간은 누구라도 절망을 피할 수 없어 보인다. 바보처럼 동전을 튕기거나 바보처럼 신을 구해야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