누렇게 변한 노트

by 자진유리



오늘은 바닷바람에 바다 코코넛이 잔뜩 떨어졌다. 내가 이곳에 온 지 얼마나 됐는지도 모르겠다. 표시하려고 쓴 그루터기에는 새겨진 자국이 너무 많아 이제는 잘 알아볼 수도 없게 되었다. 이곳 날씨는 영원히 늦여름에 머물러 있는 것만 같다. 계절풍도, 해류도 없어서 방향과 계절을 판단하는 데에 쓰이는 기술은 쓸모가 없어졌다. 다행인 건 물고기가 스스로 해안가로 뛰어 올라온다는 것과, 굴과 코코넛 또한 언제든 구할 수 있다는 것이다. 날씨가 좋을 때면 나는 신께서 보물을 숨겨놓았다는 곳으로 가 바람도 쐬고, 햇볕도 쬐곤 한다. 그냥... 내가 풀 수 없는 수수께끼는 나중에 올 사람에게 맡기도록 해야겠다.




스칸디아 군도 숲속에서 습득한 로시스의 노트이다.

나는 그만 게임에 빠져버린 것이다.

과거 너무 좋아했기로 혐오가 된 게임.

봉인된 혐오의 뻘속으로 스스로 걸어 들어가 익숙한 갯지렁이를 만지며(뻘짓을 하며), 분명 어릴 적에는 학교처럼 플레이했던 것 같은데 이제는 점수 경쟁이 아닌 누구의 삶과도 크게 다르지 않은 세계관, 이야기 속에서 비슷비슷한 캐릭터들과 빤한 여정을 함께 하며 울고 웃는 내 모습을 그나마 좀 너그럽게 봐줄 수 있게 됐달까.


아, 그때에,

친구들의, 선생들의 이야기가 들렸다면(들을 수 있는 문화가 있고 시간이 있고 마음이 있어서 이야기의 위대함을 진즉 깨달았다면).

그래서 더 많은 사람들을 만나고 대화를 나눠야 한다는 걸 배웠다면.

나는 우리가 됐을까.

우리의 이야기도 똑같이 팽창했을까.


일 년 만에 만나면 반갑고 기분이 좋아야 하는데.

나는 술 먹으면 여전히 툴툴대고 꽥꽥거리는 모양이고.

돌아오면 일주일 내리 몸 아프고 기분 처지고(뇌의 화학적 변화와 전해질 불균형).

그러니 모두가 쓸데없이 애만 쓰는 게 아닌가 싶은 거야 대체 누구 좋자고 마시는 술이고 만남인지.


잘 지내는 거 봤으면 그만인가.

그래도 친구인데 술 취한 모습밖에 모르면 되나 싶고(특별히 보여주고 싶은 모습이 따로 있는 것도 아니고 가진 것도 아니지만).


욕심인가.

그래도 언젠가 돌아봤을 때 술 마신 기억뿐이라면 많이 속상할 것 같은데.

친구가 모 그래.

진짜 후지다.

내 정의.

내 능력.

내 관계.

내 탓.

또 내 탓.

꺼져.

게임이나 해야지.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내 인생의 민지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