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너 평쯤 되는 옥상은 주되게 담배를 피우던 공간이기도 하지만 시력 회복 실험 및 빛의 파장 분석을 위해 태양과 치열하게(거의 일방적인 폭행) 눈싸움을 벌이던 콜로세움이자 연구실로, 밤이면 노란 달과 희고 붉은 십자가들 앞에 무릎 꿇는 고해소이기도 하다. 정화된 마음으로 지나가는 산새들에게 먹을 것을 베푸는 방앗간도 되는 옥상은 이윽고 추레한 남자 하나가 나체로 일광욕을 즐기는 프라이빗 비치로 전락하기에 이른다.
이 낡고 좁은 비치는 열섬현상으로 쌓인 미세먼지가 어느덧 바닷모래 크기로 입자를 불리웠으며 맞은편 건물 옥상의 통신중계기에서 밀려오는 1.0 µW/cm² 남짓의 전자파가 파도의 일을 대신하고 있다. 이런 분위기의 비치에서는 비치타월보다는 박스를 깔고 눕는 게 제격이라고 생각한다. 물론 비치 타월 같은 게 수중에 있을 리도 없다. 끝내 몫을 다하지 못한 이사박스 8호와 나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서로의 의미라도 돼보려는 듯 정오의 태양 아래 서로를 향하여 아주 보란 듯이 활짝 펼쳐져 있다.
오해
이럴 줄 알았다. 그들은 절망에 빠져있지도 않을뿐더러 하늘에 한점 부끄러움조차 없을 것이다. 다만 부끄러운 것이 있다면 그들을 바라보는 두 개의 눈일 것이며, 딱딱한 두개골 속에 숨어 세상을 비웃기나 하는 그것이야 말로 절망스럽구나.
한 치의 은밀함 없이 온누리에 직사광선을 받는다.
세례처럼 은혜롭고, 나는 갓난아기 보다 새로웁다.
이 자유, 해방감,
인간에게 이 감각은 왜 죽음처럼 낯설고 두렵기까지 할까.
줄곧 옷감 뒤에 숨어 지내던 연약한 피부, 그리고 뼈, 근육, 피하지방, 혈관들 모두 나보다 더 놀랐지. 불쾌한 놀람은 아니고 꽃다발처럼 싱그럽고 기뻤으니 어제도 오늘도 젖은 몸을 밖에 널어놓으려는 게 아니겠어. 그러고 보면 딱하기도 하지. 햇살에 들어있는 축복을 평생 주변에서, 그것도 먹다 남은 걸 눈치 보며 빌려왔을 거 아냐. 직접 얻을 수 있는 기회는 태어날 때부터 차단당했으니까. 실은 누구나 곧장 얻을 수 있는 건데 강제로 유통당해야 했고, 부조리에 눈을 뜨며 약탈자가 되었을지도 몰라. 그 과정에서 어느 집의 누구는 병들었을 수도 있고. 애당초 벌거벗었다면 우리는 아무 문제 없었을지도 모른다고.
매일 입는 옷보다 두터운 게 있지. 벗겨도 벗겨도 끝이 없는 거. 전부 벗겨낸 완전한 자유도, 착각도, 그리 오래가진 못했어. 겨울은 또 오고 나약한 몸은 또다시 주섬주섬 입기를 원했어. 괴로움은 따로 있었어. 춥지도 않은데 저도 모르게 주워 입는 버릇이었어. 그것은 어떤 죄의식이나 비참함도 느끼지 못하게 했다. 너무도 자연스럽게.
여름 오도록 방 안에만 들어 있기 좀 멋쩍어서 산책... 도 이제는 별로 내키지 않으니까 햇볕이라도 매일 듬뿍 쬐주기로 했습니다. 무문관(無門關)이라는 수행방에도 조그마한 마당은 하나씩 다 딸려 있더라고요. 어쩌면 나는 필요 이상으로 모질게만 지내온 건 아닐까 싶었습니다. 그래도 어느덧 가만있는 거, 굶는 거, 참는 거, 끊는 거, 이런 것들은 제법 잘하게 되었습니다. 이쪽은 이만하면 된 것 같으니 앞으로는 햇살이 주는 에너지가 저를 또 어떻게 변화시키는지 지켜보도록 하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