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려도 달리는 생각

by 자진유리

이상하다. 산책로 초입에 웬 비둘기들이 옹기종기 모여 있더니 내가 입구 계단을 오르자 전투기 함대처럼 동시에 굉음을 내며 내 등줄기를 아찔하게 스쳐 전방으로 훽하니 날아가 앞으로 내가 걸어가야 할 계단 난간에 일렬로 앉아 겁도 없이 나를 빤히 내려다본다. (겁도 있이) 뭐야 기분 나쁘게. 오늘따라 지나가는 사람들의 눈빛도 수상하리만큼 차갑다. 뭐야, 뭔데, 나 뭐 잘못했어? 오늘 같은 날은 몸을 사려야 한다. 사흘 만에 왔다고 숲이 삐쳤을 리도 없는데 거 참 이상하네.


“여기서 마라톤 하는 사람도 있네~?”

제 아빠 곁에 바투 선 꼬마가 날 향해 하는 소리다. 불현듯 오래전 불쾌한 기억이 스친다.

뭐라 그랬어.

네?

뭐라 그랬냐고.

키 크시다고요...

하...

짝!(내가 ^$&%*#*)

짜악!(니 &#&$#*(#)*)

짜아악!(@*&(#&#$&(%$)

짜악(%^*£

나는 단지 교복 바짓단을 조금 줄인 중삐리라는 이유만으로 지나가는 아무개에게 멱살 잡힌 채로 동네 사람 다 보는 데서 얼마쯤 귀싸대기를 처맞아야 했다. 그는 동네에 작은 아동미술학원 원장이었는데 저녁 무렵 셔터를 내리고 허리를 펴면 간판 보다 키가 컸다. ㅎ. 방금 전에 만난 땅꼬마였대도 나를 줘팼을까. 내 옆에 어리바리한 내 친구놈이 아닌 우리 아버지가 계셨다면 어땠을까. 그놈은 본능적으로 사춘기 소년에게 위협을 느낀 것이다. 저가 가르치는 아이들마냥 존재가 더 이상 귀엽게 보이지 않는 것이다. 음모가 나기 시작한 순간부터 우리는 이미 그들의 경쟁자인 것이다. 내 볼이 파랗게 터져나가는데도 아무도 그를 말리지 않았다. 그 무렵부터 우리는 생각도 말도 몹시 조심하게 되었는데 나는 특히 정도가 심했다. 사춘기 이후 나는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되었다.


체벌,

하키체가 제일 아팠고 일렉기타는 가장 분했다(반쯤 맛이 간 마녀의 뾰족구두는 무엇보다 치욕스러웠다). 좋든 싫든 처맞고 유린당하며 자란 세대들인데 이제는 저가 당한 것처럼 똑같이 줘팰 수가 없으니 혼란스러운 것이다. 충분한 이득을 취한 뒤 스스로를 단단히 고립시키고 외부에 변화를 주려면 설득은 못할 망정 위로라도 잘해줘야지 국민연금 따위는 할말하않이지 뿌린 대로 거두는 거야 이새끼들아 나는 뭐 군대에서도 말도 안 되는 갈굼만 당했지 누구 하나 실컷 갈궈보지도 못했어 후임 하나 부려 보지 못했어 어딜가나 부조리 불합리를 한 맺히도록 당하고만 살아온 세대란 말이야 니가 참아 니가 참아 얼어 죽을 보살세대로 대동단결할 셈이냐? 여자들? 맞아 나도 여자랑은 절대로 일 안 해. 걔들은 구조적으로 뚜렷한 한계가 있거든. 물론 일반화는 조심해야 돼. 괴물이 되거든. 그럼에도 본질적인 한계는 있다고 생각해. 남녀가 원만할 수 있는 지고의 역할이라는 게 있다고. 그러니 스스로는 존재만으로도 당당할 줄 알아야 하고 서로는 양보하고 존중해야 돼. 어설픈 페미들 말하는 거야. 대부분 학습된 페미지. 그런 애들이 교직에 있는 기관들도 많아. 나는 왜 가는 곳마다 이러나 몰라. 기분 잡치고 뒤통수나 맞는 통에 뭐 하나 제대로 매조지을 수가 없는 거야. 걔들은 몸 따로 생각 따로 행동 따로에 따로마저 따로따로야. 아주 기괴해. 물론 가끔 돌연변이처럼 진짜 페미가 있어. 자연산 G컵도 있다고. 일 잘해. 근데 걔들은 함부로 드러내지 않아. 대수롭지 않게 생각하거나 오히려 부끄러워하지. 알겠어? 과시하는 연놈들은 전부 다 실속 없는 짝퉁이란 말이야. 본래대로라면 자기 팔자에 없는 날개를 억지로 같다 붙였으니까 아주 도파민 빵빵 터지는 거야. 당연히 똑바로 날지도 못하고 그저 날개 신경다발에서 올라오는 환상이나 순환시키는 어리석은 뇌활동에 빠져서 까불대는 설교쟁이든, 강사 나부랭이든 다 마찬가지라고. 진짜는 예수 같이 나대지도 않아요. 그 시절에 예수가 덜렁 예수 하나뿐인 줄 알아? 예수보다 더 넓고 사랑스러운 사람들이 많았어. 다시 말하지만 그들은 조용히 있는 듯 없는 듯 살아. 인간의 삶은 괜히 남 건들면서 너스레 떨 필요가 없거든.




꾸준히 오가다 보니까 익숙해진 걸까. 까치야, 청설모야, 벌써 이만치 가까워졌어. 손 뻗으면 잡힐 것 같아. 내 기운이 한꺼풀 자연으로 각성된지도 몰라. 그렇다면 각성이란 자의식의 확장이 아닌 타의이자 외연(外緣)이야. 자연에 가까워졌다는 건 어딘가로부턴 멀어졌다는 얘기겠지만 그게 아닐 수도 있어. 위대한 팽창일 수도 있어. 하모니카 부는 아저씨서부터, 아코디언 연주하는 할아버지까지, 몇 바퀴고 몇 바퀴고 달리다 보니 비둘기는 그토록 살가운 환영인사였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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