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그리움은 연필 끝에 스미고

by 자진유리

빼꼼 연 창문으로 드나드는 바람이 한낮에도 넘 차다. 벌써 가을 하이쿠도 다 끝나가고 겨울 시리즈 개시(입동) 전까지 뭐 하나 더 해볼까 싶어서 브런치북을 새로 만들었는데 젠장할 하루아침에 기온이 쑥 내려가는 바람에 아무래도 계획을 수정해야겠어. 하늘도 맘처럼 통 미소짓지 않고 말이지. 그래도 그리움의 그림자는 어쩐지 남아 있어. 아침에 일어나기가 점점 힘들어지고 산책도 슬슬 귀찮아지는 거야. 그리움으로. 얼마나 다행인가 몰라. 추워지면 뭘 어떻게 입고 뛰댕겨야 하나 고민이 좀 있었거든. 땀에 젖은 거추장이들을 곧장 손빨래하기도 힘들어질 거란 말이지. 그냥 산책할 생각을 안 하면 되는 거였어. 이렇듯 뭘 안 해도 가볍고 충만한 마음이 찬바람에 나뒹구는 시기야. 그러면서 어릴 적 놀았던 것들이 하나 둘 땡기는 거야 젖꼭지처럼. 수영장엘 가고 싶고 공놀이(농구축구야구탁구배드민턴)도 하고 싶고 글씨 쓰고 싶고 스키도 타고 싶고 갖가지 무술도 배우고 싶고... 왠지 담배를 끊고는 전보다 더 진하게 땡기는 것 같다. 나도 어릴 때 쪼꼼쪼꼼 배운 게 전부야. 내 유년시절엔 사교육도 지금처럼 양극화된 모습은 아니었지. 학습지 등록하듯 가까운 기관에서 다양한 배움을 누구나 즐겁게 익힐 수 있었지. 너나나나 비슷한 빈곤과 풍요를 한 몸속에 지니고 있었어. 언제부터 그것들이 서로 멀어지며 급기야 분리되기 시작했는진 잘 모르겠지만 나는 또 빈곤 쪽으로 방향을 잡은 모양이지만 그래도 기뻐. 풍요는 내 그릇으론 감당할 수가 없어. 그 어리석음과 죄의 십자가를 도무지 나는 지고 살 수가 없겠는 거야. 물론 걔들이 모두 거룩한 십자가를 지고 있다는 뜻은 아니야. 이야기가 자꾸 새지만 내 스타일이기도 하고 금방 학폭위에 대한 녹취를 듣고는 기분이 몹시 더러워졌기 때문이기도 해. 슬슬 임꺽정이나 로빈훗 같은 의적이 나타나야 하지 않을까. 그들의 가슴에. 동시에 나도 돌이켜보는 거야. 조직 안에서 서로 머리를 맞대고 발전을 도모할 때 그룹의 이익과 존속 이 외에 것들을 하찮게 여기지는 않았는지. 대중이라는 어리석은 이미지로 뭉뚱그려 실추시키고 나약한 먹잇감 정도로 일삼지는 않았는지. 밖은, 특히 사람들이 모인 자리는 조심해야 돼. 정신 똑바로 차리지 않으면 금세 전염 되거든. 괴물 된다고. 호호호. 깔깔깔. 특히나 한 자리에 너무 오래 있다 보면 뭐가 왜 잘못인지조차도 모르게 돼버린다고. 갈수록 사고방식이 교묘하고 극단적이 되고 언어도 행동도 과격해진다고. 그게 대표적인 괴물화 증상인데 괴물은 마치 그게 인간의 더 높은 차원의 모습인양 환상에 빠지고는 급기야 자기도 모르게 사람들 끕 나누기 시작한다고. 그런 뒤 언젠가 마지못해 일선에서 물러나며 물러나는 모습에 따라 서서히, 또는 짜릿하게 정신 차리는 거야(과정에서 탈 나기 쉬움). 운 좋게 정신 차리면 뭐 해 그때면 주변에 아무도 없을 텐데. 아무 힘도 없고. 이게 대한민국 보통 삶의 말로 아냐? 개돼지. 정신 차려보니까 지가 제일 개돼지. 개돼지는 그제야 마늘과 쑥을 허겁지겁 구녕이란 구녕에 전부 처넣기 시작하지. 진작 쇠해버린 미각과 소화력으로. 느릿느릿. 퉷퉤. 마음에 안 들지. 못 버틸 거야 아마. 과거가 부끄럽든, 당장의 꼴이 못마땅하든, 개돼지의 탈을 쓰고는 호랑이랑 곰보다 훨씬 힘들 거야. 모쪼록 힘내라고들. 나는 연필 냄새나 마저 맡아야겠으니까.


켈슨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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