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 날씨는 당최 이게 가을인지 겨울인지 봄인지 여름인지 너도 모를 테야. 그래도 연필을 코에 가만 대고 있으면 알 수 있어. 믿을 수 있다고. 아마 이 느낌의 담배맛이 있었다면 영영 못 끊었을지도 모르겠네. 연필 냄새는 안정감을 줘. 복잡한 향수나 인공 냄새랑은 다르게 단순하고 균일한 분자 구조이기 때문이래. 후각도 적당히 단순한 냄새일 때 피로가 적고 신경전달 패턴이 안정화된다는 거야. 입력의 복잡성이 낮아야 대뇌변연계의 과활성이 줄어. 결과적으로 차분하다, 편안하다는 느낌을 가질 수 있는 거지. 단색 조명 아래서라든지 일정한 리듬이 있는 소리를 들을 때 마음이 진정되는 원리도 그래. 또 연필은 자연도 생각나게 하지. 비슷하게 나는 산책할 때에도 모르는 나무랑 하이파이브를 하거나 아는 나무의 엉덩이를 찰싹 때리는 버릇이 있지. 그런 마찰에서 나오는 에너지가 있어. 연필도 그렇다고 봐. 그 힘은 연필이 몽땅해질수록 강력해져. 연필만 해도 이런데 어떻게 디지털이 좋다는지 난 통 모르겠다. 디지털은 말야. 감각을 퇴화시킨다고. 인간이 아니게 된다고. 그러면서 서로가 잘났다는 단발적인 레시피는 발달하지. 모든 게 수치화, 정량화 돼. 언뜻 똑부러지고 명확해 보이지만 시전자도 속이는 악마의 속임수야. 세상에는 수치라든가 정량, 그런 게 없어. 때문에 내일이면 딴소리를 하게 되지. 자기를 옮기고 설득하기 바빠. 그런 건 변화도 발전도 아닌데 말이야. 똑똑한 놈은 그걸 꿰뚫어 봐. 거기에 더해 나쁜 놈은 그걸 이용하고. 공통적으로 감각이 떨어지는 애송이들이 팔짱 끼고 앉아 평생을 그러고 있는 거야. 감각적인 사람을 낮잡아 본다고. 그래야 저의 열등함과 콤플렉스가 세상을 지배할 수 있으니까. 그들도 살려는—쉽고 빠른—방식이기는 한데 너무 만연해진 것 같다. 게다가 폭력적이기까지 하지. 쉽고 빠른 것들은 그래. 죽음과 가깝지. 대개 기업에서 하는 일들이 그렇지. 죽음을 모시면서 무슨 크리에이티브를 바라는지 모르겠다. 자기가 얼마나 멍청한 소리를 온종일 떠벌리고 다녔는지 이제는 알까.
그리움은 구름 같아. 번지듯 느릿한 움직임을 따라가다 보면 빨려 들어갈 것 같아. 거기 그대로 있지만 눈 깜빡하면 없고. 연필 냄새를 맡다 보니까 말이야, 기름종이를 대고 드래곤볼을 따라 그리던 소년이 나타나. 머지않아 소년은 초사이어인의 헤어스타일(만)은 눈 감고도 그릴 수 있게 되었지. 무슨 생각인지 빈 곳마다 번쩍이는 그 솔방울들을 잔뜩 그려댔어. 소년은 학급이 올라갈 때면 이름 콤플렉스 때문인지 낯을 몹시 가렸는데 만화 덕분에 친구들과 금방 친해지기도 했어. 용돈을 모아 매달 팡팡을 사 읽으며 공책에 만화를 그리기 시작했어. 언젠가는 팡팡을 베꼈지만 아니라고 우겼던 적도 있어. 주호라는 친구에게 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야. 우리는 하나의 공책을 공유하기 시작했어. 게임을 만들기 시작했지. 가위질까지 동원해서 전략시뮬레이션 게임을 만들었어. 삼국지 천명이라는 게임이 있었는데 그걸 모티브 삼았던 것 같아. 우리는 제목이 뭐였더라. 뭐였더라. 나의 만화는 거기서 끝나버렸어. 교실 뒤에 숨어 있던 프로브에게 소환당하고 말았다. 머나먼 아이어 행성으로 강제로 끌려갔다.
그렇게 잊혀진 줄 알았건만 만화는 멀리 있지 않았어. 스물두 살 첫회사에는 파티션 건너 플래시애니메이션 팀이 있었고, 셰프였다가 손을 다쳐서 만화를 그리게 된 사람과 한동안 같이 일을 하게 되는가 하면, 만화가의 게스트하우스를 특별히 기억하고, 이말년과 주호민, 김풍들의 만담을 좋아하기도 하고, 아무리 생업이 바빠도 자기 전에 웹툰 보는 걸 빼먹지 않았다. 직장동료가 주식창에 매달리거나 응원하는 팀의 경기 결과를 확인하듯 그랬다. 그런 데다 요즘은 자기 전에 만화를 너무 오래 보고 있노라. 과연 일본 만화는 수준이 높아. 그 어떤 예술 장르라도 함부로 만화를 무시할 수 없다고. 와... 대체 이 사람은 누굴까. 친해지고 싶다. 동질감마저 느껴지고, 별 것 아닌 듯한, 가슴 뛰는 공연 무대보다 훨씬 여리고 나지막한 두근거림이 어쩐지 내게 점점 다가오는 거야. 종래에는 와... 존경을 넘어 진짜 재밌겠다. 부럽다. 이러고 있더라고. 어쩌자고 말이야. 아... 이거였으면 어떡하지. 나는 줄곧 만화를 좋아한 건 아니었을까. 음악도 글도 어딘가 성에 차지 않았던 거(동굴벽화만 봐도 만화가 더 근본), 간절하지 못했던 거, 사랑에 졌던 거, 돈에 무너졌던 거, 그놈의 장인정신과 개성까지 들어 있는...
선생님께 적어 냈던 꿈(장래희망)은 세 가지였어. 처음은 경찰이었고, 다음 학년엔 만화가였어, 중학교 무렵에는 막연하게 어부라고 말하고 있었지. 지금도 그 세 가지 영혼은 나를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여. 30년이 지나도 변하지 않는 그 무엇이지. 결국 나를 더욱 깊이 알아야만 했던 거야. 지나치면 안 됐던 거야. 지나치면 사랑에 속고, 돈이나 벌게 돼. 정작 자신에 대해서는 아무것도 모르는 채로 말이지.
당분간 하이쿠 쓸 시간에 만화에 대해 공부해 보는 시간을 가지려 합니다. 참 묘한 인연이군요? 28일 후 대체 얼마 만에 28년 후라는 영화를 우연찮게 보다가 덩달아 28년 후 다시금 만화를 힐끔 바라보게 된 것입니다. 언젠가 화방에 가서 스케치북, 크레파스, 붓펜, 4B연필 따위를 홀린 듯 집어 왔던 것도 다 만화로 다가가는 과정이 아니었나 싶군요. 브런치도 그렇고요. 벌써부터 하이쿠 같은 세 컷 만화를 목표 삼아 볼까 싶기도 하고 아무튼 다시 기름종이를 대고 시작해 보는 겁니다. 그다음은 무엇인지 궁금하니까요. 이 오래고도 정겨운 책과 함께 공부하면서 여러분께 소개할 만한 것들이 있다면 짬짬이 옮겨 보겠습니다. 잠깐 살펴본 것뿐인데도 여러모로 굉장하거든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