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께하는 오늘, 잘풀리는 내일

균탁 6

by 자진유리


D-1


이슬비 맞은 단풍이 끈적한 혈액으로 흘러내린다. 찍을까 말까 잠깐 고민하는 사이 고민할 줄 모르는 걸음은 저만치 홀로 멀어져 간다. 만약 휴대폰이 없었다면... 고민할 필요도 없이 보는 것으로 만족이다. 찍자 마자 미련 없이 돌아서지 않고, 걸음을 멈추고 풍경이 되는 것이 욕망이 된다. 단풍을 바라보고 있는 사내의 모습은 그래서 어떻게 보이던가. 혹시 사랑처럼 느껴지지는 않던가. 어느덧 보기는 완성이 아닌 과정으로 전락했고 보는 힘 자체도 미약해졌다. 따라서 보는 것으로 감사하지도 못한다. 추억능력도 겸사겸사 감퇴한다. 이제 우리는 순간을 대가리 찍어 과거로 밧줄 묶어 고문하지 않으면 불만족이다. 이미 모두는 진작에 오체불만족이다. 오체씩이나 갖고도 한체도 제대로 쓸 줄 모르는 등신들이다. 등신들은 평생 뇌연구 따위에나 매진해 겨우겨우 한체를 몸밖에다 만든다. 만드는 중에 아마 깨달았을지도 모른다. 하지만 여기까지 와서 멈출 수는 없다. 이미 너무 많은 기대를 입금받았다. 세상은 몸뚱아리에 다 있다. 몸뚱아리로 인한다. 평생에 걸쳐 몸을 때우며 깨우치기에도 모자란 삶은 맨몸만으로도 충만하고 즐거운 것이었다. 그 즐거움을, 고통을, 느끼며 내일을 더욱 기뻐하고 희망하는 마음이, 그 능력이 또한 기쁨의 메아리로 후대로 후대로 이어져야 언젠가 신한테 어찌어찌 비벼보기라도 할 텐데... 고작해야 땅 아니면 돈으로 이어지는 명맥은 새로이 눈을 떠도 눈은 이미 먼 채로. 축복받은 귀한 눈도 멀기 전에 스스로 두 눈을 찌르는 게 유행이라지. 뭐 그래도 괜찮다. 하지만 만약 네가 신의 힘을 기억해 내고 진실을 보여주고 싶다면 결코 잃어버려선 안 된다. 또한 그것을 비웃는 눈먼 자들에 맞설 힘은 길러야 한다.


산엔 아픈 사람이 많다. 씁쓸한 냄새와 초점 없는 눈동자, 서너 개의 다리들이 안개보다 천천히 떠다닌다. 할 말의 무게만큼 꾹 다문 입술들. 그들이 쌓아 올린 조그마한 돌탑들이 비바람에 모두 나자빠졌다. 분명 이 산도 얼마 전에는 푸른 바다였겠지. 비가 그치면 탑도 훌쩍 자라 있겠지.





D+1


~그렇게 꿈을 찾아 훨훨 날아갔답니다~


였더라면.


단 한 번만이라도 그랬더라면.


그러나 현실은 녹록지 않다 못해 냉골차다. 푸른 동산 같은 녹록(碌碌)의 의미에게로 도망치듯 주의를 옮겨 본다. 돌에 이끼가 낄 수가 없다. 구리에 녹이 슬 정신이 없다. 나는 또 꾸역꾸역 일 년을 참아 균탁에 이르렀다. 엄마는 혼자 오지 않는다. 작은 몸뚱이에, 잊혀진 수십 명의 혼을 주렁주렁 달고 나타나 내 앞에 제사 지낸다. 내 콧구멍에서도 따가운 매연이 쉴 새 없이 뿜어져 나오고 있다. 도대체 여긴 어디란 말인가. 이제는 진물 나듯 썰려나간다. 거봐, 이렇게 금세 떠날 거면서. 떠넘기고 내팽개치고 사라질 거면서. 안 된다. 더 늦게는 못하겠다. 이젠 내가 먼저 없어지리라. 010. 겁. 겁. 겁. 겁. 두렴. 두렴. 이제 나는 천사의 날개가 떨어져 나간 까닭을 알겠네. 매연이 잦아들자 코딱지 앉아 한참을 홀로 후볐다네. 저녁에는 내 머지않아 이 삿된 인연마저 철새처럼 끊고 절간으로 꼬라박겠다 선포했다네. 질린다. 겁에 질리고 사람에 질린다. 졸리다. 지금 당장 졸려 죽고만 싶다. 오늘 밤엔 그럭저럭 눈을 붙이나 보다, 했지만 보다시피 새벽은 또다시 나를 흔들어 깨우고 갈라져 터진 내 등줄기를 더듬거린다. 이 차가운 손톱을 무엇으로 떨치나. 암만 실리콘을 덕지덕지 처바른대도 화산암의 흠들은 구멍의 그림자로 미소 짓네. 아아 나는 목이 마르다. 미친 삼다도. 삼다수 속에도 돌바람이 용오름치는구나. 그리운 삼신할망이여.





D-2


요 며칠 놀라운 일들이.

일어나는 것을 본다.

살기가 힘들어서 힘 좀 달라고, 않던 기도를 했는데 정말 힘을 얻은 모양.

그 힘으로 벌어진 비눗방울 같은 일들을 목도하는 건 또한 두려움.

힘의 또 다른 이름.

과연 보시기에 좋은 일인가.

100수 앞을 내다 본대도 101수를 모르는 게 인간이므로,

하지만 그것이 함부로 수를 둬도 된다는 의미는 더욱 아니므로,

나는 또 한 번 삼 년을 견딜 수 있을까.

이제 다시 눈을 감고 두 손을 모은다.

살다 보면 기도의 통로가 내 머리 위로 돌아오는 순간,

얼마나 머물지 모르므로 부지런히 고백해야 한다.

소망의 기쁨, 발원의 재미에 푹 빠진 요즘이다.


(~한 요즘이다.’라고 난생처음 써본다. 왠지 여자여자하면서도 관습적인 감성체... 으. 읽는 것만으로도 낯간지럽다 못해 까무러칠 것 같은데 느닷없이 손끝에 달라붙길래 어디 한번 내비둬 봤다. 이 정서는 역시 안 되는 걸까. 다시는 말아야지.)





(D-3)+(D+3)


두루마리 휴지심이 곁에 나뒹굴고 있길래 살살 뜯어서 펼쳤더니 아주 근사하고 완벽한 다이아몬드 마름모꼴 대지를 얻었다. 감탄하며 문화재에 낙서하는 심정으로(워워 안 해봄) 뭐라도 그려 넣어 봤다.

작품의 유일한 의도는 나중에 말풍선을 불어넣었다가 돌연 응가를 가득 채워넣은 것

(뭘 그릴까 고민할 새도 없이 나비뿔테안경이 그려지나 싶었는데 짱구눈깔이 되었고 입술은 왠지 90도로 비틀어져 항문처럼 되었다. 김에 네 이름은 귀여운 응꼬맨이다. 창작은 저절로 전개되는 맛이 있다. 거기에다 초심자는 자연의 순수한 감칠맛도 더해진다. 존재는 그저 연필이 가는 길을 신기하게 관람할 뿐이다. 온에어로!), (소설가의 일도 그럴 테냐, 재밌냐), (작고 어린 꿈을 꾸기만 했을 뿐인데도 어떻게 알고 찾아오는 가슴 벅찬 시련에 덜컥 무릎부터 꿇고 마는 형제여, 그러나 개판 5분 전으로 시간을 되돌리는 인간의 불가사의한 능력과 수고는 이 얼마나 어리석음과 동시에 아름다운가! 영차영차! 그리워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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