병마와 휴지심

by 자진유리

나는 병마와 병신, 병원과 병구완이라면 애초에 두루마리 휴지심에 처박힌 코 푼 휴지조각 정도로 밖에 여기지 못하는 사람이다 세상은 나에게 무엇보다 일찍 체념을 배우게 했다 여느 아이들과 같이 키가 자랄수록 마음도 점차 부푸는가 했지만 조금 떠오를라치면 똑똑 끊어지고 얼굴은 용암처럼 녹아내리고 두개골이 지진처럼 들썩이고 갈라지는 고통을 홀로 견뎌야만 하는 열 살 아이의 두려움과 고독을 아는가 매년 똑같은 운명에 고꾸라지며 이 몸으론 남들처럼 노력이라는 게 불가능하다는 절망에게로 십 년 넘도록 무참히 무릎 꿇려봤는가 그런 내게 일찍이 삶은 사랑이나 가르쳤다 그조차 평범한 사랑이 될 수가 없었다 사랑도 십 년이 넘으면 운명을 거스를 수 있게 된다는 걸 알았다 그런 나에게 무엇이 남아 있는지 그대가 감히 헤아릴 수 있는가 남들은 세속의 정답을 맞히며 나날이 당당해져 갈 때 나 홀로 정답 없는 사랑을 찾아 지구도 모자라 깜깜하고 숨도 잘 안 쉬어지는 지구 밖을 얼마나 오랫동안 떠돌았는지 자네가 아는가 이해한다한들 네 코털과 내 코털이 무슨 수로 같은가 네 코딱지와 내 코딱지가 어떻게 똑같은 물성일 수가 있겠는가 이것들이 내 설계의 과반이니 나도 모르는 암흑물질의 속성처럼 다만 그대는 짐작할 뿐이다 가스 구름 같은 감정들이 몸 여기저기서 삐져나올 때마다 나는 별을 떠올리지 않는다 오직 너희만이 숱한 호기심과 욕정으로 한순간 별이 되리라 판단할 뿐이다 그래도 나 역시 그걸 좋아하고 아낀다 내 생명이자 이 삶의 연료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바라봄은 지구가 태양의 궤에서 벗어나지 않으려 늘 깨어있음과 같다 허나 그것은 아주 멀리 내팽개쳐져 보아야만 겨우 인간의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다 그 아들은 이제 다시 하나님을 본다 비로소 내 주를 향해 기쁨과 찬미의 기도를 올릴 수 있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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