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y 자진유리


아침. 누운 자리에서 눈을 켜고 부팅을 한다. 가늘게 엉킨 숨이 가슴을 쓰다듬고 전류를 온몸 구석구석으로 흘려보낸다. 개별 기능들이 깨어나 독립적으로 작동할 때, 또 서로 연결된 직후에 필연적으로 발생하는 온갖 소음들을 안정화시킨다.


심장과 뇌, 그 밖에 몸을 구성하는 모든 미세한 조직들이 손을 맞잡고 함께 숨 쉬기 시작한다. 그것이 유기적으로, 하나의 숨덩이가 되어 한 목소리를 내고 몸밖 세상과 어우러질 때까지 나는 잠자코 그 움직임, 진동을 살핀다.


때때로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오류를 바로 잡아야 할 필요도 있다. 불규칙하게 진동하는 과거와 미래, 꿈의 해석, 온갖 감정과 생각들. 그 먼지들을 팬 밖으로 내보내야 한다. 그것을 작품 하는 것도 괜찮다.



시스템이 제대로 돌지도 않는데 무리해서 창을 연다든지 기타 작업을 수행하려 하면 당연히 버벅거린다. 이 인간은 성능이 썩 좋질 못해서 부팅하는 데 시간이 많이 걸린다는 것을 모르고 살았다. 할아버지가 왜 아침이면 한동안 눈을 감고 앉아 계셨는지 이제야 알겠다.


정신없이 출근해야 하는 존재는 샤워시간을 이용하면 된다. 코도 뺑 풀고. 가는 물줄기들이 피부를 자극해 주면 시스템이 활성화되는 데 도움을 받을 수 있다.


세간에서는 이부자리부터 개라고 말한다. 어느 퇴역 군인의 말로 알고 있다. 좋긴 하다. 의미가 없진 않다. 통제, 삶의 주도권을 갖고 시작하는 하루, 모르지 않는다. 그런데 그가 그랬던 이유는 군인이기 때문이란 것도 생각해봐야 한다. 군인 하면 무엇이 떠오르나. 성취가 떠오른다. 점령이 떠오른다. 목적이 떠오른다. 칙칙폭폭 하루를 시작할 셈인가. 세상과 다툴 참인가. 그래서 제대로 이겨본 적이나 있는가. 그게 승리고 성공이라 생각하나. 그렇다손치면 그 기분은 얼마나 지속되던지. 매일 그 상태를 유지하기 위해 스스로에게 또 남들에게 얼마나 폭력을 휘두르고 있는지는 알랑가. 자신이 점점 어떤 모습이 되어가고 있는지 알랑가. 암만 거울을 들여다 봐도 모를 것이다.



내 안에 하려는 자, 하지 않으려는 자.

욕망하는 자, 뿌리치려는 자.

그를 조율하려는 자.

그들을 한 단계 위에서 관장하는 가장 눈부시고 자비로운 자.

뭐라고 이름 붙일까.

이미 드러난 이름을 갖다 붙이면 곤란해지겠지.

나는 그것에 의탁할 때, 그것이 나를 움직일 때, 그것이 될 때, 가장 따스하다. 모든 생명의 속성으로부터 자유로우며 물처럼 투명하고 공기처럼 가볍다.


그러나 너무 그 빛, 자비로움에 취하면 청소 따위의 일상적인 일들을 자꾸 미루게 되는 문제가 생긴다. 세상은 아무 문제가 없는데 일으키는 마음만 존재하기 때문이다.


청소하자 맘먹기란 때로는 너무 어려운 일이므로 최대한 안 해도 청정하게 지낼 수 있는 지혜로운 상태를 유지하곤 있지만 어느 정도는, 대한민국 서울에 사는 인간답게는 살아야 하기 때문에 결국 고무장갑을 껴야 할 날이 온다. 그날엔 전권을 김억 장군에게 넘겨준다. 장군의 통솔 하에 나를 구성하는 모든 것들을 목표에 집중시킨다. 그렇다고 빛이 사라진 건 아니다. 그것은 배경음악처럼 늘 어디에나, 곁에 머물고 있다. 그걸 그렇다고 느끼지 못할 뿐.


그러므로 빛으로 돌아가는 것도 사실 어렵지 않아야 했는데 나는 그것이 너무 어려웠다. 기쁘면 기뻐 날뛰다가 넘어졌고, 넘어지면 슬픔에 아주 깊이 함몰되었다. 순간의 정서들만이 오직 나라고 굳게 믿엏다. 그것에 최선을 다해 반응하는 것이 참이자 가장 자연스러운 것이라 믿었기 때문이다. 그로부터 원하는 것을 얻을 수도 있었으나 그것은 찰나였으며 그 뒤는 오랜 고통과 절망뿐이었다. 어떤 것이든 끝내 허무였다. 그것을 수없이 반복하다 보면 어떤 희망도 기대도 하지 않게 된다. 죽음이 그랬다. 그러는 동안에도 세상은 그대로 멀쩡히 있다는 것을 나는 인정하지 않았다.



빛의 천사들은 내게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폭포처럼 끊임없이 쏟아지는 빛. 나는 그게 머리 위에 둥지 튼 참새라고 생각했다. 그것은 평생 누적된 경험과 지식, 애벌레의 모든 관념을 허물어 재구성하는 번데기 작업이자 시작일 뿐이었다. 지난 봄 나는 무엇으로 다시 태어났던가.


빛을,

그것을 생각대로, 경험대로, 무의식대로 잘못 해석하고 쫓아가다 보면, 멋대로 규합시키고 잘못 이름 붙여 구분 짓게 되면 혼돈이 된다. 그걸 병원에 들고 가면 멋진 병명을 부여받은 환자가 되고 오래전엔 마녀라 불릴 수도 있었을 것이며 성령이나 해탈 등의 종교적 깨달음이라 생각할 수도 있다. 조금 틀면 사이비가 될 수도 있고 신내림을 받아야 한다 착각할지도 모를 일이다. 다 조금씩 제멋을 부리고 어긋낸 결과가 그렇겠구나 싶었다. 물론 신념 따라 그래도 되지만 굳이 안 그래도 된다. 그것과 세간을 연결시키면 특정한 상像이 생기게 된다. 그러면 인식으로부터 자유로울 수 없다. 스스로 한정하게 된다. 아주 큰 손해다. 이를테면 한국 목사는 욕을 먹고 신부는 목소리가 단정해야 하며 스님은 의복은 물론 헤어스타일, 먹는 것, 그리고 일상까지 아주 흔들림이 없어야 한다는, 그래야 한다는 것들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없게 된다. 아주 큰 손해다.


믿음을 깨야 한다. 진리의 말씀마저 내다 버려야 한다. 그 정도로 한정지어서는 안 된다. 적어도 그 말씀을 적었던 사람 그 이상의 무엇이 되어야 한다. 이조차 안 적는 게 최고긴 하다. 말하지 않는 게 최선이다. 외계인이 하는 말을 우리가 무슨 수로 단박에 알아먹겠는가. 우리는 하나이지만 별개의 우주이기도 하므로 비유가 아니다. 너 자신을 알라고 했잖은가. 스스로 알아낼 뿐이다. 나는 평생 오직 이것만이 궁금했고 열망하며 앓아왔으니 이제라도 얼마나 개운하고 감사한 일인지 모른다.


예수가 하느님 우편에 앉아계신다고 들었다. 그리고 우뇌의 기능을 따져보면 엇비슷해 보인다. 농담이지만 거기에 비슷한 무엇이 있는 것 같다. 나는 왼손이 하는 일을 때로 오른손이 모르게 하고, 왼손 오른손이 하는 일을 서로 바꿔보기도 하는 것이다. 서툶과 다양한 감정, 생각, 그것을 바라보는 자세, 종국에 어떤 자비로움을 발견하기까지, 발견을 자극하기에 괜찮은 방법인 것 같다. 그것으로 세상을 대할 때 나는 가장 잘 살고 있다고 느꼈다.


내가 사랑해마지 않는 작가 선생님은 이런 것을 두고 만트라라고 말했던 것 같다. 나도 비슷한 주문이 있다는 걸 알게 되어 아주 신나 죽겠다. 슬램이라든가, 가서 몸통 박치기 하고 싶다.




극은 다 썼다. 레제드라마로 남길 것인가 아니면 배우를 모을 것인가. 배우를 모으면 불필요한 사업이 될 것이다. 그건 나의 메시지가 아니다. 그러므로 나는 오늘도 그냥 밖으로 나간다. 비극의 주인공이 될 수도 있고 보몰로코스가 될 수도 있다. 아주 신나 죽겠다. 빛은 무엇도 될 수 있다. 단 하루에도.


눈을 깜빡이는 이 순간을 구성하는 모든 것이 우주이자 신이며 두근거리고 있다. 길가에 핀 포인세티아도, 광장에 모인 흙비둘기도, 못의 개구리조차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그들이 인간처럼 어리석었다면, 빛을 모르고 지혜를 알지 못했다면 똑같이 뇌를 부풀려 알고자 하는 욕망, 지능을 갖게 됐을 것이다. 옷을 짜입고, 자동차를 굴려댔을 것이다. 몰라서 그렇다. 그런 사람을 세간에서는 가장 똑똑하다고 말하는 것 같다.


세상에는 몸속과 똑같은 일들이 벌어지고 있다. 빛, 자비는 몸 바깥에서도 유효하다. 그것으로 바라보면 세상도 아무 문제가 없다.

지금 이 순간, 이대로 완벽하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