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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Mar 13. 2024

섬그늘에

우리들 마음에 빛이 있다면

 

 1. 카페


십 년 전 커피를 배웠던 나의 커피 성지에 다녀왔다. 당시 이 동네에 카페는 꼴랑 두 개였고 그마저도 로스터리카페는 이곳이 유일했는데 지금은 주위만 대충 둘러봐도 열개는 넘는 것 같다. 카페는 열 개인데 드나드는 손님은 다 합쳐봐야 카페 숫자만큼도 안 된다.


왜들 줄줄이소시지 카페를 엮어나가냐면 만만하고 돈이 된다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실이다. 남는 장사고 만만하다. 적어도 이십 년을 버틸 수 있다면야. 저 아홉 개의 거대하고 텅 빈 카페는 과연 무슨 맛이 날까. 수십 년 동안 삼촌의 오른 어깨가 홀로 구부정하게 내린 몇십 톤의 커피 맛을 저들은 알까. 느낄까. 그렇다면 저렇게 바보 같은 일을 벌일 리가 없다.


브런치스토리도 그렇고 온오프라인 어딜 가나 비슷한 모습으로 생태가 달라지고 있다.

하는 사람만 있고 누리는 사람은 없다.

누리는 사람이 왜 없냐면, 하는 사람이 잘 못하기 때문이다.

왜 잘 못하냐면 의도가 불순하기 때문이다.

마음의 빛으로부터 일을 시작하는 사람이 별로 없다.

또한 빛으로 비롯되었더라도 근본이 미약하니 금세 사그라든다.

그래서 제일 잘하는 자연으로 가는 게 낫다.

적어도 태초가 만든 장소는 어디의 무엇이든 완벽하고 그(상태)에게 맞는, 그에게 필요한 모든 걸 내준다.

그래서 해변에 앉아 싸구려 믹스커피 한잔 마시는 게 만이천원짜리 하와이안 코나를 마시는 것보다 훨씬 삶에 도움이 된다.

 

왜 아직도 이모냥인지 모르겠다.

분단이 되지 않고 어떻게든 종결이 됐던가 그 앞서 일본과 어쩌고 됐어야 했다.

그게 차라리 순리에 가깝다.

억척스럽게 버티고 살아남아 있으니 한만 가득하다.

그 불행한 정신이 지독하게 안 없어진다.

그 한 어디다가 풀래.

같은 민족 등쳐먹는 걸로 풀리드나.


슈카가 그랬다.

전 세계 17개국 대상으로 인생에서 가장 가치 있는 것이 무엇이냐 물었더니 대부분의 나라가 가족, 사랑이었고 유일하게 대한민국만 돈이었다. 2순위가 건강.

고로 돈이면 다 된다는, 돈 많이 벌어서 건강하게 지혼자 잘살면 그만이라는 어리석은 것들이 아직도 넘쳐난다는 말이겠다.

돈 많이 버는 것과 건강은 같은 노선을 탈 수가 없는데 그만큼 멍청한 국민이다.

그 정신을 이을 새 생명들이 줄고 있으니 한편으로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카페 삼촌에게 커피 내리는 걸 봐달라고 요청드렸다. 스승 앞에서, 다른 환경에서, 다른 주전자를 들고 스스로 미약하게 긴장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자 후드티 앞주머니에 왼손을 푹 집어넣고 숨을 조절한다. 자연스레 미소가 머금어지려는데,


"주머니에서 손 빼! 어디서 건방지게 ㅋㅋ"

"앜ㅋㅋㅋ"


구멍이 있으니 집어넣어야 합이 된다.

그리고 안정감이 생긴다.

주머니 없는 옷은 곤란하다.

더러운 손을 숨길 수가 없다.

맞잡을 손이 없다.


"물줄기는 좋은데 물이 너무 많아. 이만큼이 225ml니까, 조금 더 빨리 내려도 돼."


서버 없이 눈금 없는 커피잔을 가늠하고 그에 맞게 커피를 채워주는 일.

제대로 맞춰주지 않으면 누군가에게는 흘러넘칠 거고 누군가는 모자라다 생각할 것이다.

또 너무 빠르면 잡맛이 난다.

주전자 기울이듯 주의도 사람 봐가며 잘 기울여야 한다.

주전자는 손목과 어깨, 그러나 정신으로부터고 주의 역시 다이렉트 정신이다.


태권도 배울 시절부터 알던 거였다.

그러나 언제부터였을까 까맣게 잊어버린 것이.

근본이 아닌 것을 믿으면 그 외의 것에는 대처가 안 된다.

근본을 믿으면 무엇이든 어떤 상황이든 근본에 속하기 때문에 탈이 없고 문제가 없다.




우연히 이곳에 방문한 사람들의 마음을 읽는다. 옛 생각도 나서 눈물이 고일랑말랑한 페이지도 몇 있었는데 떨구면 글씨가 번질 테니 눈물생명이 만들어지려던 것을 코 들이마시듯 눈 안쪽으로 훅 빨아들였다.


비슷한 자리에 앉아 비슷하게 부서지는 풍경을 바라보며 누군가는 절망을 말하고 다른 이는 희망을 말했다.(절망편은 스킵)




 2. 말


자연스럽게 살질 못하니 글 같은 게 창궐한다.

인간이 생각을 몸 밖으로 드러내는 방법은 다양한데 획일적으로 곧장 말로 한다.

말이 쉬워서 그런가 하면 그렇지 않다.

말은 인간에게만 쉽다.

어렸을 때 자꾸 말을 시키고 말하는 법부터 배워서 그렇다.

평생 소통을 말로 해서 그렇다.

그러니 돈 대신 천냥 빚 갚고 칼 대신 사람을 죽이기도 하는 게 당연지사다.


아빠한테 그랬다.

아빠는 종종 들뜬 기분을 알아채지 못하는 것 같다고.

나이 들면 원래 흥얼거리는 게 아니라 아빤 원래 그랬다고.

대부분 상관없지만 가끔은 나도 거슬리고 엄마도 사람이 가벼워 보인다고 했고.

물론 어디 가서 그러진 않고 가족 안에서만 그렇다손 쳐도.

두 가지.

왜 툭하면 흥얼거리나.

왜 툭하면 흥얼거리는 남편, 아버지의 모습이 마음에 들지 않는가.

= 남에게 좋은 걸 줘야 한다, 자기가 편하고 좋은 것만 무의식적으로 드러내면 불편한 사람이 생길 수 있다.


운전을 하다가도 무슨 간판이 나오면 꼭 그 글자를 특유의 역양을 넣어서 소리 내어 읽는 아빠. 아버지.

침 흘리듯 입 밖으로 불필요한 말이 절로 새어 나온다.


아빠는 지휘도 하고 기도도 하는데 평소 얼굴이 처져있고 입고리도 내려가 있어서 누구처럼 인자한 표정을 가지고 싶다고 말했다.


"그러면 그 기분을 입 밖으로 흥얼거리지 말고 표정으로 드러내는 연습을 해보세요. 그럼 인자해질 것 같은데?"



엄마도 그래.

그게 사실이든 거짓이든 습관적으로 매번 -아니야, -없어 같은 부정적인 말이 엄마 입 밖으로 나오면 그게 어디로 가겠어.


어떤 현상을 마주했을 때,

아빠의 어떤 모습을 봤을 때,

내 머리칼이 너무 길고 엄마 마음에 안 든다고 생각이 들 때,

생각.

생각.

사실이 아닌 그저 엄마의 그릇된 생각.

언어로 창작하기 전에 일단 멈추는 연습을 좀 해 봐요.

눈 앞에 펼쳐진 것을 판단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확인한 나의 반응을 관찰해보세요.

보고, 듣고, 맡고, 그걸 가지고 나는 왜 줄곧 이런 생각을 할까.

그 생각은 왜 이런식으로 입 밖으로 드러날까.

왜 한결같은 프로세스를 유지하고 있을까.

계속 질문해 봐요.

그럴 일이 아니라니까 그러네.


그거 다 벗겨내야 해요.

밖에서 물든 거.

벗겨내야 됨.

세상엔 예쁘고 더 예쁜 것밖에 없다고.

언젠가부터 엄마는 생각의 환상을 믿고 있다고.


그리고 부부는요.

한몸이잖아요.

그러려면 각자의 몸을 반씩 잘라내야겠죠.

슬프고 고통스럽겠지만 나중에 잘려나간 반을 보세요.

과연 거기에 자신이 조금이라도 있었나.

 



표정으로도 충분하고.

드러나는 것을 모두 창작이라고 친다면 세상에 창작은 너무 많다.

신이 너무 많다고.

왜냐면 생명답게 살지 못하게 세상이 방해하기 때문이지.

그로부터 살고자 돌연변이 갈래가 나온다.


요즘 드는 생각은 가능한 짝을 찾아서 내새꾸를 놓아야겠다는 것. 내알라도.

그로부터 자연히 알게 될 것을 사람들은 쓸데없이 너무 돌아간다.

돌아가면서 부푼 쓰레기 봉투를 흔들고 국물을 흘린다.

그리고 어리석은 사람들이 그 냄새를 추앙한다.


창작의 고통은 쌉소리고

그 고통이 무엇으로부터 왔는지 알아차리고

보다 더 적극적으로 타개하려는 노력이 필요하다.

글은 너무 치졸하다.

아무리 생각해도 쪼렙이나 하는 소꿉놀이 같다.

근심이 많거나

두렵거나

믿지 못하거나

더욱 요즘 사람들은 그럴 때에 습관적으로, 또는 그 정서를 사랑하고 허우적거리며 쓴다는 것이 행간에 담겨있다.

그래서 뭘 읽어도 사유가 빈약하니 재미가 없다.

글 역시 번식과 같으니 세상에 무언갈 남기려는 생명의 본능이다.

근심, 두려움, 불신, 그로부터 죽음의 공포가 다가오면 번식이 어려우니 다른 걸 택하는 거지.

그보다 새 생명 하나 만들어 세상 빛 보여주는 게 훨씬 가치 있고 거룩한 일일텐데 불쌍한 대한민국.


그러니 나는 앞으로 무엇을 지어야 하나.

나까지 쓸데없이 싸지껄여야 할 필요가 있나 싶은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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