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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아회재 Mar 24. 2024

태양의 재채기

대화


해를 직시하다 재채기가 났다.

왤까요.


'광반사 재채기, 빛 재채기 반사(photic sneeze reflex) 또는 아추(ACHOO, 엣취) 증후군이라 불리며(...)'


검색하니 결과가 나온다.

안 나와야 상상하고 이름 붙이고 증명하는 재미가 있는데.

다만 연구된 바는 없단다.

또한 유력한 가설이라서 내가 더욱 유력한 걸 만들 수도 있다.

엣취증후군이라니 이름 너무 귀엽게 잘 지었다.

휘젓고 무너뜨리길 좋아하지만 누군가 이미 만들어 놓은 것도 곧잘 따른다.

귀여운 것은 따른다.

누구에게나 무해한 것은 흔쾌히 따른다.





비가 온다.

그러나 비가 오나 눈이 오나 만날 수 있는 사람이 있다.

"아~ 이 새끼 예술해야 되는데..."를 오만이천번 말한 녀석이다.

나는 예술을 오랫동안 알아듣지 못했지.


친구라는 심상의 조건과 방향은 따로 떼어져 사방으로 흩어졌지만 어느덧 다시 한 데 뭉쳐지려는 기미를 느낀다.

그것은 정신의 연결이자 통합일 수 있고 특정한 공간의 기운일 수도 있다.

공간은 사람일 수도 있고 시간이라 적을 수도 있다.


비를 맞는다.

검은 바탕에 빨강과 빨강무렵 꽃, 초록과 초록무렵 이파리가 그려진 크록스를 신고 빗물을 밟는다.

찰박찰박 콘크리트 저 아래 깊숙이 잠든 뿌리를 건드린다.

식물도 동물이다.

그래서 이 분류도 썩 내키지 않아 몹시 휘젓고 싶다.

너무 오래되어 굳어진 분류 방식이다.

이러면 인간은 식물을 잘 모르게 된다.

관심조차 없게 된다.

인간과 다르다고 생각하게 된다.


안경 없이 아마 닷새, 엿새인가.

옥상, 쓰레기 버리는 동안, 가까운 편의점 다음으로 집 밖을 여행한다.

하필 비까지 온다.

이러면 보통은 두려움이 더욱 커져야 할 것이다.

그러나 앞이 잘 안 보이니 가뜩이나 없는 두려움에 용기가 더해지고 말았다.

사랑하는 사람을 만나러 가는 기분보다 더욱 경쾌한, 이토록 존재가 가볍고 자유로울 수 있을까.


어두운 시선들은 다가오지 못하고 파괴되고 나는 파괴로 떨어지는 빗물을 눈그릇에 한 방울씩 담는다.

눈으로부터 온몸이 진동한다.

살아있고, 살아있다.


늦는다.

하필 주인은 TV와 너무 가까운 자리를 내줬다.

별수 없이 거기 앉아 기다린다.

TV에서는 뭔가가 사납게 나를 노려 보고 내 주변은 텅 비어 있으며 멀찌감치에는 사람들과 사람들의 식사소리가 분주하다.


흩어질 것 같은데 주의를 모을까.

스마트폰을 꺼내 주의를 모은다.

이 경험에 대한 것을 적는다.

'불안.'


훈제보쌈...

우리는 잔을 비울 줄 알아 여기 있고, 대화하고 있다.

살아남기 위한 강렬한 체험을, 한날한때 개죽음을 공유하지 못했다면 그보다 많은 시간이 필요하다.

서로 다른 말로 해야 하기 때문이다.

만약 우리가 등을 맞대고 전장을 함께 누볐다면 이럴 필요가 없을 것이다.


나는 무엇에 대하여 확고하는 말버릇을 가려 써야 할 필요가 있을지도 모른다.  

반대로 한국 사람은 '~것 같아요' 습성이 있다.

인터뷰에서 특히 많이 보인다.

개중에 '좋은 것 같아요'는 정말 최악이다.

좋은 감정마저 뭔지 모르는 어리숙한 사람처럼 보인다.

미덕인지 유교관인지 뭔지 잘 모르겠지만 답답하고 자신이 없어 보인다.

무의식적으로 'ㅇㅇ같아요~'가 튀어나온다는 것은 생각이 뚜렷하지 않기 때문이다.

생각이 뚜렷하지 않다는 것은 마음에 미지와 두려움이 남아 있다는 것이고 미지와 두려움은 모름이다.

그래서 알아야 한다.

머리가 아니라 가슴이 알아야 한다.


녀석의 말처럼 나에게는 말하기 앞서, 또는 어딘가에 '내 생각은 이래~'정도의 장식은 필요하겠다 싶다.

아무리 진실이래도 그렇게 말해주어야 대화라는 게 원만히 되겠구나.

우리는 서로를 알려주려 온 게 아니고 대화하려 온 거니까.

또 깨달음과 같은 종교적 색채의 단어, 누구에게나 익숙지 않거나 오해할 수 있는 고정관념이 된 단어를 조심할 필요가 있겠다.

배운다.

그리고 대화 속에서 배울 사람이 한 명 더 식당 문을 열고 들어 온다.




"남녀로 나뉘는 조건은 뭘까, 착상의 낮밤일까. 체위 중력의 높낮이 일까, 방향일까. 단지 에너지의 규모일까, 총체의 비율일까, 바람일까. (...) 너 같은 애들이 많이 낳아줘야 한다니까. 빨리 낳아. 만약 네가 말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면, 굳이 말할 필요가 없는 작은 문제가 있다면 내 생각엔 아이가 풀어줄 수 있을 것 같은데. 여자는 출산의 고통이라는 붕괴이자 기회가 있잖아. 그건 되게 닮았어 아무리 생각해 봐도. 죽음과 탄생이야. 새로운 문이 열리면 앞선 문제들은 사라져. 문제는 함께 못 와. 열리면 못 오고 못 와야 열리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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